신비한 고대왕국 조문국(召文國), 그 사적지를 가다
조문국(召文國)
조문국은 약 이천 년 전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에 존재하였던 고대 부족국가이다. 조문국은 많은 기록은 없다. 대동지지(大東地志)와 읍지(邑誌)는 ‘현재의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에서 남쪽으로 25리 떨어진 금성면 일대’에 조문국이 있었다고 전한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9대왕 동왕 2년(서기 185년)에 벌휴이사금이 조문국을 정벌하였다’는 내용이 짧지만 강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조문국은 삼한시대 의성지역에 번성했던 부족국가였고 벌휴이사금 때인 서기 185년 신라에 복속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고려 시대 의성부였던 문소군이 원래 조문국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의성지역에 조문국이 있었다고 나온다. 거대한 고분으로 추론컨대 신라에 병합되기 전까지 독자적이며 융성한 문화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의성군 금성면이 조문국 도읍지로 지금까지 규모가 매우 큰 100여기 등 모두 374여기(2015.4 의성 금성산고분군 일원 문화재 지표조사 보고서)의 고분군(古墳群)이 남아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최소한 몇 세기에 걸친 족적(足蹟)이라 짐작되므로 삼한의 초기부터 존재하던 부족국가라 추정할 수 있다.
조문국 고분 거님길
의성의 동남쪽 금성산 아래 옛 무덤들이 무리 지어 누워있다. 북동부 산지에서 발원한 하천과 남동쪽 경계를 넘어온 하천이 면의 서부에서 합류해 만든 삼각형의 땅, 금성면의 대리리, 탑리리, 학미리 일대이다. 크고 작은 고분들은 370기가 넘는다. 그중 대리리에는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60여 기의 중대형 고분이 분포되어 있다. 조문국 후예들이 남긴 고분군이다. 사적지 초입에는 봉분 모양의 안내소와 이층의 팔각 전망대가 있다.
봉분들 사이 키 낮은 울타리로 구획된 산책로는 ‘고분 거님길’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고즈넉함과 함께 고요한 정적에 감싸인다. 고분 거님길을 거닐다 보면 풀 냄새와 흙냄새가 생생하게 몰려든다. 어떠한 소음도 들리지 않고, 이따금 발소리에 놀란다. 봉분들은 침착하고 고요하게 솟아 있다. 대부분 원형의 봉토분이다. 봉토를 이루고 있는 저 엄청난 양의 흙은 이 지역의 흙색과는 다른 순수한 점토라고 한다. 다른 지역에서 운반해 왔으리라 판단되는데, 그에 따르는 막대한 노동력은 통치자의 정치적 영향력을 짐작하게 한다. 영속화된 권력과 영구한 힘이 봉분으로 쌓여 있다. 고분의 발굴조사는 1960년부터였다. 그리고 금동관, 금동관장식품, 금동제귀걸이 등의 화려한 장신구와 함께 철제 무기류, 마구류 등이 출토되었다. 초기 국가 형성기의 대표적인 정치 집단이 이 땅에 존재했다는 증거였다. 조문국은 지금, ‘잃어버린 고대 왕국’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어떤 기록들보다도 먼저 금성(金城)이라는 땅의 이름이 오랜 정체를 소리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1호 고분 ‘경덕왕릉’
고분들에는 대부분 묘석이 없다. 1호, 2호라는 숫자가 묘석을 대신한다. 단 하나의 무덤만이 묘석을 가지고 있다. 1호 고분, 조문국의 경덕왕릉이다. 능 앞은 ‘召文國景德王陵(조문국경덕왕릉)’이라고 쓰인 비석과 문인석, 장명등, 상석으로 단장되어 있다.
경덕왕릉을 발견한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전설이 있다. 하나는 지방 사람들에 의해 구전되어온 이야기다. 지금의 능지는 약 500년 전 오이밭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밭을 지키던 농부의 꿈에 금관을 쓴 백발의 노인이 나타난다. ‘나는 신라시대 조문국의 경덕왕(景德王)인데 너의 원두막이 나의 능 위이니 속히 철거를 하라’고 명하고는 농부의 등에다 한 줄의 글을 남기고 사라졌다. 잠에서 깨어난 농부는 등의 글이 그대로인 것을 보고 놀라 현령에게 고하고 지방의 유지들과 의논하여 봉분을 만들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조선 숙종 시대 학자 미수 허목의 문집에 기록으로 전해진다.
한 농부가 오이밭을 갈다 커다란 구멍을 발견한다. 구멍으로 들어가자 금칠을 한 석실 한가운데에서 금관을 쓴 금소상(金塑像)을 보게 된다. 욕심이 난 농부가 금관을 벗기려 하자 손이 금관에 붙은 채 떨어지지 않았다. 그날 밤 의성현령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나는 경덕왕이다. 이 무덤을 개수 봉안토록 하여라”고 말했고 이후 봉분을 쌓고 관리하였다는 이야기다. 영조 원년인 1725년에는 현령 이우신이 경덕왕릉을 증축하고 하마비 등을 세웠고 그때부터 왕릉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곳을 지나며 쓴 미수 허목 선생의 시가 있다.
“번화했던 그 모습 다시 볼 수 없고 /
거친 풀 들꽃만이 향기롭구나 /
다닥다닥한 옛 무덤엔 / 민둥민둥 백양 한 그루 없도다 /
둔덕 위에 밭 가는 농부는 /
아직도 경덕왕을 이야기하고 있네.”
조문국 사적지 내에는 작약꽃을 4,200㎡의 규모로 매년 1만 5천 포기를 식재하여 작약꽃 단지를 조성한다. 작약 꽃밭은 야간경관 조명이 설치되어 있어 낮과 밤에도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다. 작약(芍藥,peony)은 다년초로 꽃송이가 크고 탐스러워서 ‘함박꽃’이라고도 하며, 꽃말은 ‘수줍음’이다. 매년 5월 중순부터 말까지 개화한다.
조문국 사적지 주차장 주소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 377-2
[출처 : 의성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