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2021-05-17 함성호 시인
꽃
- 백무산
내 손길이 닿기 전에
꽃대가 흔들리고 잎을 피운다
그것이 원통하다
내 입김도 없이 사방으로 이슬을 부르고
향기를 피워 내는구나
그것이 분하다
아무래도 억울한 것은
네 남은 꽃송이 다 피워 내도록
들려줄 노래 하나 내게 없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내 가슴을 치는 것은
너와 나란히 꽃을 피우는 것은 고사하고
내 손길마다 네가 시든다는 것이다
나는 위험한 물건이다
돌이나 치워주고
햇살이나 틔워 주마
사랑하는 이여
- 백무산 시집 ‘인간의 시간’ 중에서 /
창비 / 1996년
나같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최상으로 여기는 작자에게는 감히 꿈도 못 꿀 감성이다. 내 하는 일 없이 뭔가가 이루어진다면, 그거야말로 하늘에 감사하고 이웃에 감사할 일이지 원통할 건 뭐람. 그러나 그게 뭐든, 너를 위해 한 내 행위가 너를 시들게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사랑은 너를 위한 나의 일이기도 하지만 먼저, 그 일이 너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곰곰이 생각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랑은 종종 성급함으로 나를 ‘위험한 물건’이 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