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안 룰렛
러시안 룰렛
- 원성은
방부제 냄새가 난다면 그것은 일상인지도 모르지
표백제가 묻은 깃털이 떠오른다면 사랑이 끝난 것인지도
그렇지만 너도 알겠지
네가 만든 요리의 유통기한은 너만 아는 거야 너만…
1인칭에 빗금을 치면 비가 내리겠지
똑바로 서 있어도 비스듬하게 꽂히는 빗줄기들
청자를 생략한 2인칭이 잘라버린 말꼬리들을
다 잃어버리면
비가 그치겠지 여름이 오겠지
여름은 절대적인 것 청춘처럼
목구멍 속의 뼈처럼 참았던 울음의 댐을 무너뜨리는
사랑처럼
뱀이 직선으로는 기어갈 수는 없는 이 세계의 척추처럼
하지만 꼭 그래야만 하는 어떤 불가능처럼
절대적인 여름을 너도 기억하고 있겠지
회고조로 말하는 사람을
골목 끝에 오래 세워두어서 그렇다
가능한 빗방울보다는 현실적인 구름을 수집해놓아서
그런 것이다 너는 텅 빈 주머니를 뒤적거리겠지
아무것도 베팅할 것이 없다는 것을
너만 아는 거야 너만…
- 원성은 시집
‘새의 이름은 영원히 모른채’ 중에서
아침달 / 2021년
이 시는 분명한 인과관계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하다면 ~할 것이다’라든가, ‘~는 ~처럼’으로 분명한 문장구조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의 내용은 앞과 뒤가 전혀 연관성이 없다. 서로 상관없는 말의 내용을 인과관계의 문장구조 안에 집어넣고 천연덕스럽게 무엇을 예상하고, 비유하며 결론까지 내린다. 더구나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뒤바꿔 놓기까지 한다. 그래서 이 시를 읽고 난 다음엔 뭔가에 속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 불쾌함은, 어쩌면 내가 나를 감쪽같이 속인 일들까지 그 안에서 불편하게 웅성거리며 나를 환기시키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