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애

2021-01-20     함성호 시인

편애

- 정운희

나는 왜 내가 아닌 너일까에 대해 생각하다가
화단에 꽃들을 모종하기 시작했지
멀쩡한 달빛만 흩트려놓았지

가령 유달리 태양이 편애하는 바나나가 있다면
내가 모르는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노란 바나나가 아닌 빨간 바나나
빨간 바나나가 아닌 노란 바나나, 
그것도 저것도 아닌
지금 막 도망치려고 하는 저 초록의 바나나
덜 삐딱한 초록 바나나에서 
더 삐딱한 초록 바나나가 되기까지

내가 아닌 너의 그림자로 움직인다
너를 닮은 거짓말을 하고
나를 위한 속삭임이 멈출 때
나는 봉숭아꽃의 색으로 몸을 쓰고
너는 봉숭아꽃의 일요일을 꺼내 쓴다

당신은 왜 내가 아니고 너일까 골몰하다가
햇빛을 구겨 던지다가
지붕 위 별들만 꼬집었지
네 그림자를 한찬 동안 깨트렸지

나는 없고 너만 투명한 놀이터에서

 

- 정운희 시집
  ‘왜 네가 아니면 전부가 아닌지’에서 
  푸른사상 / 2020년

‘나는 누구일까?’가 아니라 ‘나는 왜 너일까?’를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일까? 적어도 그런 사람은 나는 누구일까, 생각하다가 더 깊은 수렁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나는 왜 너일까?’ 생각하다가 그런데 ‘너는 왜 내가 아니고 너지?’라는 물음이 생길 때 웃음은 거기서 터져 나온다. 그건 ‘나는 누구일까?’란 질문도 우습게 만들고, ‘나는 왜 너일까?’란 질문도 우습게 만든다. 세상 심각한 질문들을 모두 우습게 만드는 질문 하나가 잘 드는 비수처럼 만들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