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녘, 너도밤나무에게

2020-12-02     함성호 시인

저물녘, 너도밤나무에게

- 조명


한 잎이 천 잎 같고 천 잎이 한 잎 같아
울음소리 지축을 흔들어 어질머리 앓는 공중
조그만 잎사귀 뒤편에는 조그만 어둠이 살아
해진 날개를 접고 톱니 발톱으로
한 마리 어둠이 천 개의 몸통을 돌려 내려오면
해종일 눈코 뜰 새 없었던
내 머리통은 천 마리 어둠을 끌고 기어 올라간다
맴! 맴! 쓰르람쓰르람 맴! 맴! 쓰르람쓰르람
혼절할 듯 울다 마주친 겹겹 누액의 블랙홀
한 속이 천 속 같고 천 속이 한 속 같아
석양 아래 낙하하는 다갈색 망사 날개의 저녁
가없는 잎사귀 뒤편에는 가없는 어둠이 살아
누군가 하이힐로 밤의 표면을 노크한다
 

- 조명 시집 ‘내 몸을 입으시겠어요?’
  민음사 / 2020년

저물녘의 숲에서 우리는 이제 조그만 있으면 아무것도 식별하지 못하는 밤이 오기 전에 하루해의 마지막 식별을 행한다. 그것은 밝은 태양 아래서는 알아보지 못했던 아주 세세한 느낌까지 잡아낸다. 낮 동안보다 어두운 저물녘에서야 낮보다 더 세세히 식별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그게 하루의 마지막 빛이라서 일 것이다. 마지막은 우리의 감각을 일깨운다. 더는 없을 것들을 향해 몰두하는 감각. 그건 아마 후회의 감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