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휘의 건축생각] 전세제도는 미래의 한국 건축을 발전시킬 에너지원이다
올해 국토교통과학기술진흥원이 시작한 ‘건축설계 인재육성사업’ 중 연수비를 지원하는 내용에 대해 건축계 내부에서 의견이 분분했다. 현재 한국 건축의 위상에 대해서 공공이 바라보는 인식을 확인한 건축인들은 자존심이 상한 것 같다. 이런 공적 지원을 통해서라도 한국건축의 성장이 빨라지거나 높아지기를 기대해본다. 동시에 우리 스스로 이미 가지고 있는 임대제도와 부동산 상황이 시스템적으로 한국 건축의 발전을 돕고 있음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유럽 대도시가 에어비앤비 효과의 부작용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고 한다. 빈집이나 빈방을 잠시 임대하던 에어비앤비가 인기를 끌면서 일 년 내내 임대를 하는 주택이 급증하고 있다. 등록된 주택의 수를 비교해보면 런던, 파리, 로마, 코펜하겐, 베를린 순이다. 대도시에서 실질적인 주택 수를 줄이고 있다는 뜻이다. 인기 지역의 주택 수 감소와 저금리는 복합적으로 대도시의 집값을 올리고 결국 월세를 가파르게 올리면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이 때문에 유럽도시들은 에어비앤비의 주택 대여 기간을 제한하거나 전면 금지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건축인의 시각에서 이런 부작용을 심각하게 보는 이유는 부동산을 소유할 수 있는 수요자의 급격한 감소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산을 축적하지 못한 중산층의 증가는 설계의뢰자(건축주)로 발전할 후보군 감소로 이어진다. 반면, 대부분 외국과는 다르긴 하지만 우리에게는 매우 익숙한 한국의 전세제도와 부동산 상황에 묘수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나라는 자산을 축적하는 것에 익숙한 젊은 층의 후보군이 두텁다. 통상 꽤 많은 한국의 신혼부부는 전세나 매매를 주거의 형태로 우선 검토한다.
우리의 전세제도는 부작용을 극복하기 위해 확정일자 등록이나 공적 보증보험을 도입하는 등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꽤 안정적인 제도가 되었다. 심지어 타인의 자산을 기준으로 전세자금 대출이 가능한 신기한 대출제도도 운영 중이다. 여기서 묘수는 젊은 층이 큰 빚을 내고 관리하면서 자산을 축적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부모의 재산을 상당히 증여를 받기도 하지만 이것 또한 증여받은 자산을 비교적 젊은 시절부터 관리하고 증식시키는 경험을 하는 좋은 기회가 된다. 여기에 아파트라는 손쉬운 안전자산이 존재한다. 대출을 받고 자산을 취득할 때 안전성이 모호하다면 대출이나 부동산 투자는 매우 어려운 선택이 된다. 어떤 이유로든 아파트를 안전한 자산으로 여기는 사회적 합의는 부동산이라는 어려운 주제에 매우 쉽게 투자하도록 유도하는 안전장치다.
대부분 외국의 경우처럼 수입의 상당부분을 임대료로 소비해야 하는 경우 젊은 시절부터 큰 대출을 받고 자산을 관리하기가 어렵다. 임대료가 전문임대업자의 자본으로 흘러가는 구조에 의해서 임대회사는 계속 성장한다. 이런 사회구조에서는 공공적 임대의 비율을 높여 임대료 상승을 제한해야 사회의 안정성이 유지된다. 하지만 이런 임대료 통제가 우선되는 안정적(?) 구조에서는 자본축적보다는 잉여수입 소비에 더 집중하게 된다. 단순히 건축시장의 측면에서만 본다면 자본을 축적하고 있는 중산층이 두텁지 않기 때문에 소규모 개발을 추진하는 건축주의 후보군도 많지 않다.
묘수는 여기에 있다. 한국의 중년층은 전세제도로 자산을 유지시킨 경험이 있고 안전자산(아파트)을 통해 자본을 축적한 소유자로, 이미 설계의뢰자(클라이언트) 후보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자산을 재편하면서 건축주가 될 수 있는 후보들인 것이다. 대출에 대한 경험도 충분하기에 이들은 건축주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심지어 소규모 개발 시 공사비를 정산함에 있어 다시 전세보증금을 상당 부분 감당할 수 있는 상황으로 전환되므로 전세보증금은 소규모 개발의 도구가 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전세제도와 아파트가 보증해주는 ‘확보된 안전자산’은 설계·공사 생태계를 유지시켜주는 중요한 시스템이 되어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기회를 보아야 한다. 비생산적인 부동산 시장으로의 자본집중 현상, 저급한 설계비와 공사비 문제 등이 하루아침에 해결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역발상으로 우리의 시스템이 가진 장점을 살리는 방식을 찾아내어야 한다. 이에 대한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 미국의 대형 건축사사무소의 성장과 이탈리아의 장인기업의 성장을 비교해 보겠다.
한국을 포함한 세계 다수의 초고층빌딩은 미국의 대형 건축사사무소들이 수주를 해오고 있다. 한번은 유럽에서 미국의 대형 건축사사무소들을 초대하여 회의를 한 적이 있는데 당시 유럽회의의 주재자가 미국이 초고층빌딩의 설계시장을 주도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문의했다고 한다. 참석한 사무소의 수장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면서 머쓱해 했는데 왜냐하면 미국의 어떤 종합적인 전략도 국가적인 지원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호시절을 통과하면서 성장한 미국의 대형 사무소들은 미국의 경기가 침체돼 설계시장의 감소폭이 커지자 이에 대한 보충으로 자연스럽게 생존을 위해서 해외시장을 개척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들의 성공은 특별한 전략보다는 생존을 위한 경쟁의 결과물이었다.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미국이라는 국가브랜드의 힘이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뉴욕이나 시카고의 마천루 경험이 브랜드화됐지만 사실 필자를 포함해서 미국 대형 건축사사무소의 실무 경험자들은 초고층빌딩 설계에 엄청난 노하우가 비밀스럽게 탑재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바꿔 말해 한국의 대형 건축사사무소도 미국의 대형 사무소처럼 세계적 역량을 발휘하기 위해 노력해오고 있지만 아쉽게도 세계시장에서 메이저 플레이어로 자리 잡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이탈리아의 장인기업문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이탈리아의 글로벌 대기업을 쉽게 기억하지 못 한다. 대신 프라다, 구찌, 불가리, 람보르기니, 마세라티 등 명품브랜드를 수십여 개 기억해낸다. 이탈리아의 장인기업은 약 130만 개가 있으며, GDP의 15% 정도를 생산하고 전체 고용의 20%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높다. 물론 이탈리아도 장인기업을 유지하는 데에는 국가브랜드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한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도 장인기업들이 산업 생태계 안에서 생존하려는 노력이 있었기에 명품브랜드의 나라가 되었다.
1900년대에 이탈리아 대기업이 급격히 성장할 때 장인기업들도 대기업과 대등한 위치를 지켜내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자동기계 등을 적극 도입하는 한편 장인 커뮤니티와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대기업만큼의 물량을 소화하고 고품질을 유지했다. 이탈리아는 장인기업에 세제와 우대정책을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장인기업 자체의 경쟁력이 없었다면 이런 지원을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영역은 다르지만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일본건축의 입지를 살펴보면, 세계 선두에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일본건축은 대형 사무소보다 개인적으로 브랜드화가 된 작은 사무소로 알려져 있다. 국가브랜드를 볼 때 이탈리아나 일본에서도 대형 건축사사무소의 입지가 세계적으로 높지 않다는 점을 확인해본다면 다음은 우리도 소형 건축사사무소의 성장가능성을 살펴보아야 한다.
다시 우리의 상황으로 돌아와서 보면 우리는 매우 긍정적인 상황에 놓여있다고 생각된다. 자산을 확보한 많은 중산층이 소규모 부동산 개발에 두려움 없이 뛰어드는 트렌드가 소규모 설계시장의 성장과 건설 생태계를 유지시키고 있다. 최근 춘추전국시대 혹은 우후죽순처럼 보이는 소규모 개발이 설계시장의 전반적인 소형화를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양이 많아질수록 질적 성장의 기회도 늘어난다. 건축인들은 단순히 숫자로만 인식되는 허가 건수의 증가나 감소보다는 ‘설계에 관심을 가지는 트렌드’와 ‘과감한 소규모 개발이 지속되는 현상’을 고려해 활발히 교류하고 성장을 자극하는 등 경쟁력을 갖추려 해야 한다.
만약, 이탈리아의 명품산업을 사치품으로만 치부하면 이탈리아 고용시장의 20%가 위협받는 동시에 이 산업과 관계 맺고 있는 다양한 산업의 파생성장을 놓치게 된다. 반복되는 부동산정책의 목표가 자칫 우리의 눈을 흐리게 하고 기존 제도의 장점을 놓치는 결과로 흘러가서는 안 된다. 다행히 우리는 운(?) 좋게도 자산이 축적되는 것이 가능한 부동산문화를 시스템(전세제도, 전세대출, 전세 보증보험 등)으로 구축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명품브랜드가 산업이 된 것처럼 우리의 건축시장도 우리의 부동산 문화와 소형 건축사사무소의 경쟁력을 발전시킬 수 있는 자본력을 이미 갖추고 있다. 세계적 건축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공적 지원의 힘도 활용해야 하지만 우리는 이미 강력한 지원을 부동산 시스템으로 구축해 놓았다. 행운의 판도라 상자가 열리고 많은 열매가 맺어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