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친부
경복궁의 4개문은 그 용도가 다르다. 남쪽의 광화문은 정문으로 3개의 홍예문으로 되어 있고, 가운데 문은 임금만이 드나들 수 있다. 5문인 북경의 천안문보다 두 개가 적은데, 이는 천자와 제후의 차이이다. 나머지 세문은 하나의 홍예문으로 방위에 따라 이름 지었다. 북은 신무(神武)문으로 평소 음기가 많다하여 잘 사용하지 않았으며 청와대 자리에서 거행되던 과거장 행차 때나 사용하였다고 하는데, 반정에도 이용되었다. 서는 영추(迎秋)문으로 승지들과 홍문관, 교서관 등 궁내에서 근무하는 관리들의 출입문으로 쓰였다. 동은 건춘(建春)문으로 왕세자가 거처하는 춘궁 즉 동궁이 근처에 있었다. 이 문으로는 왕족 척신 상궁들만 드나들었으며, 그렇기에 바로 길 건너 종친부와 의빈부가 자리했다.
▲의빈부란 공주 옹주의 남편인 부마와 왕세자의 딸들인 군주 현주의 남편들의 부서이고, 종친부는 역대 왕들의 어보(족보)와 어진영(초상화)을 모시고 이들의 의상을 관리하고 종실 제군의 봉작, 승습, 관혼상제, 다툼의 해결 등 시무를 행하던 곳이다. 종친부 관원은 대군 등 영종정경부터 그들의 현손인 정6품 감(監)에 이르렀다. 조관(朝官)으로는 유사당상에서 약방, 고직이 군사 등 40여명이 근무하였다. ▲현존하는 관사는 중당인 경근당과 익사로 옥첩당이 있다. 중당은 정면 7칸, 측면 4칸인데, 정면과 측면의 좌우에 한 칸씩을 덧댄 형식을 취하고 있다. 덧칸은 폭이 좁으며 전 후면의 툇칸은 트인 공간이다. 가구는 7량집으로 이익공(二翼工)에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지붕은 용두와 취두는 있으나 잡상은 없으며 사분합문과 상부에 광창을 설치하였다. 익사는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바닥높이도 낮고 초익공으로 하는 등 격을 낮추었다. ▲이 건물은 ’81년 신군부에 의해 정독도서관으로 옮겨졌고, 부지는 기무사로 사용하였다. 현 정부는 국립현대미술관이 과천에 있어 어려움이 많다는 미술 문화계의 숙원에 따라, 현상공모에 의해 이곳에 서울관을 건축 중이며, 문화재 관계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종친부 건물도 부지 내에 이축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토목공사 중 종친부건물의 기단이 발견되자, 서울시문화재위원회는 기단 밑의 지하공간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결정을 내렸다. ▲프랑스의 르부르 박물관은 건축가 I·M 페이가 유리 피라밋 지하공간을 만들면서 기존 궁전으로 통하는 3개의 지하 통로를 만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경복궁 때문에 12미터 이상의 층고를 허락하지 않아 지하 밖에는 길이 없는데, 지하층이 종친부 기단 지하 2미터 밑에 자리하여 위치와 외형 상 아무 하자가 없는데도 이를 불허한다는 결정을 내린 것은 재고해야하지 않을까? 25%에 달하는 종친부 밑 지하층의 변경은 득보다 실이 많음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