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선의 건축생각] 봉준호, BTS를 보며 쓰는 참회록
봉준호 감독이나 BTS 얘기가 나오면 한국 사람인 것이 너무도 뿌듯하다. 저들이 세계 유수의 상을 받는 모습에선 자주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러나 한 켠으로 울적하다. “우리 건축은?” 1990년대 강의하던 대학의 문과수석 입학생은 영화과로 이과수석은 건축과로 왔다. 당시 거의 모든 대학에서 건축과 입학성적은 의대, 법대보다 높았다. 지금 그들은 뭘 할까. 내 경우 설계하는 후배는 평균 서너 명, 없는 학번도 있고 대부분 법조, 금융, 공무원, 의사가 되어있다.
그저 단순 비교를 한다면 이래야 한다. 봉준호나 방시혁과 비슷한 90 언저리 학번 누군가가 지금쯤 세계적 명망을 얻었거나 일본은 8명이나 가져간 프리츠커상 한두 번 탔어야 맞다. 또 당대의 준재들이 몰려 세계적 기업이 된 전자나 자동차처럼 건축설계도 한국을 먹여 살리는 대표 산업 중 하나가 됐어야 옳다. 우리 건설경쟁력은 일본보다 높은 세계 7위 정도니 물량이나 기술력이 낮은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왜 우리 건축은 세계 건축계에서는 존재감이 없고 왜 여전히 ‘정신력’으로 버텨야 하는 직업일까?
벤야민은 건축과 영화의 공통점은 관습적이고 집합적으로 예술 수용이 이루어지는 것이라 했다. 대규모 자본이 투입되고 수많은 대중이 감상하는 이 두 장르는 그러므로 뛰어난 작가 한 사람에게 의존하는 다른 예술과 다르다. 클라이언트, 담론생태계, 산업인프라 세 가지 모두 갖춰져야 한다. 봉준호의 성공 뒤에는 할리우드를 자주 초라하게 만드는 한국관객과 작품성만으로 기꺼이 모험하는 투자자들이 있다. 또한 전 국민이 영화 평론가라 할 만큼 왕성한 담론판과 많은 작품으로 단련된 관련 산업계가 있어 가능했다. 한국건축은 조만간 봉준호나 BTS를 꿈꿀 수 있는가? 위의 세 가지 지표로 한번 살펴보자.
먼저 클라이언트의 수준. 맘 좋거나 돈 많은 건축주로부터 좋은 건축은 나올 수 있지만 위대한 건축에는 덕목 하나가 더 필요하다. 고도의 문화적 소양이다. 건축 선진국에서는 3대째 이상의 부자들이 이 역할을 맡는다. 급히 부를 얻은 우리 1세대들은 건축을 여전히 실용품이나 과시수단으로 여기고 다음 세대들은 해외 건축가 수집에 관심이 더 많다. 그렇다면 믿을 곳은 공공영역인데 이곳은 ‘절차적 공정성’이 율법이다. 한 해 설계되는 공공건축물 9000여 개 중 90%는 가격입찰이고 나머지가 설계공모인데 이나마 임자 정해진 판이기 쉽다.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뻔한 작품이 뽑히니 참가자들 또한 자기검열을 통해 뻔한 것을 제출하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둘째, 담론 생태계. 한국 영화가 강한 것은 피도 눈물도 없는 논객들이 태작들을 가려내고 준작들도 사정없이 벼려서다. 그런데 한국 건축에는 건축평론이 없어진지 오래다. 주례사 수준의 해설서와 박람기식의 소개 글은 넘치나 건축을 깊이로 읽어내고 혹독히 다루는 평론은 드물다. 평론할 거리가 없어서인지 아카데미즘이 공부를 하지 않아서인지는 알 길이 없다. 위대한 건축은 시대를 가르며 나온다. 이를 표 나게 알아차리고 해석하여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진정한 건축평론의 임무다. 안도 타다오를 서구에 소개시킨 케네스 프램튼이 그랬다. 그가 저서를 통해 소개했던 파울로 다 호샤(2006), 피터 줌토르(2009), 에두아르 드 모라(2011), 이토 도요(2013), 알레한드로 아라베나(2016)는 모두 프리츠커 상을 받았다. 프램튼 같은 이도, 그의 눈에 띌만한 작업도 없음이 한국건축이 변방인 까닭이다.
셋째, 건축 산업 인프라.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디자인은 현실에서 구축될 수 있다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태어난다. 공법, 재료, 디테일, 엔지니어링이 따르지 않는 혁신 디자인은 페이퍼 아키텍쳐일 따름이다. 저들에게는 사무소 안팎에 백전노장 해결사들이 있으나 한국 건축계에는 이런 인프라가 없다. 극도로 양극화되어 중소규모 사무소는 기술 축적의 여력이 없다. SOM이나 Foster처럼 사내 기술력이라도 키워야 하는데 대형 펌에서 연륜이 쌓이면 영업이나 관리로 돌거나 나와서 독립해야 한다. 규모를 막론하고 한국에서 설계업은 생계형이라는 얘기다. “97년 이후 토목엔지니어링 대가는 3번에 걸쳐 2배 가까이 올랐는데 건축 설계비 요율은 왜 제자리이냐?” 건축계 사람이 아니라 기재부 예산실장이 한 말이다.
한때 대형회사 사장이자 교수였으며 한 때 협회 회장이기도 했던 나 같은 사람이 가장 죄인이다. 어깨가 점점 처져가는 후배와 제자들을 보며 쓰는 참회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