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늦은 저녁 나는

2020-06-16     함성호 시인

어느 늦은 저녁 나는

- 한 강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  한강 시집 
 『서럅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중에서
   문학과지성사 / 2013년

누구나, 소중한 것이, 별 거 아닌 것이, 깜박하고 있었던 것이, 대수롭게 생각했던 무엇이, 어떤 것이,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느낄 때가 있다. 지나가버린 그 자리가 뭉텅 패여서 곧 무엇으로 자연스럽게 메꿔지긴 할 것인데, 그 순간은 시간마저도 그 빈 자리에 들어서지 못하는 영원이 있다. 빈 것이 빈 대로 그저 존재하는 시간, 무엇이 있었던 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 무엇인가가 영원으로 떠난 자리, 그 자리에서 시인은 밥을 먹는다. 무엇이 떠나갔든, 어찌되었든 밥을 먹어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