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은 있고, 대가는 없는 건축사!

2020-06-01     대한건축사협회 건축사신문

건축사를 둘러싼 외부 조건들이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 아울러 각종 안전사고들로 건축사와 관련된 제도와 정책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고 있다.

2018년 9월 서울시 상도동 가설흙막이 붕괴돼 인근 유치원이 기울고, 같은 해 9월 경기도 화성시에서 10미터 옹벽이 무너져 사상자 4명이 발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러자 정부는 부랴부랴 ‘깊이 10미터 이상인 토지 굴착공사’와 ‘높이 5미터 이상 옹벽 설치공사’ 시 비상주 감리 대상인 경우일지라도 공사기간 동안 관련 분야 경력 2년 이상의 건축사보 등 감리원 상주를 의무화하는 대책을 발표했다. 그러면 더 이상 이런 사고는 나지 않아야 한다. 과연 그럴까? 이후로도 수시로 안전사고가 일어나며, 해당 감리 건축사를 징계하고, 건축사에게 책임을 묻고 있다.

가설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재해자가 전체 건설현장에서 발생한 재해자의 26%를 차지한 것으로 2013년에 집계된 적이 있다. 가설공사가 높은 비율을 차지한 원인으로는 가설도면이 미반영됐거나, 공사비 절감을 위해 형식·외형적 구조물로만 가설구조물을 설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가설 도면 업무에 비용을 지불할 중소 건물주들이 없다. 그렇다 보니 일부 지자체는 가설 도면을 무료로 도와준다.

공무원이 가설 도면을 그릴 린 천부당만부당한 일이고, 당연히 지역 건축사에게 마치 선심을 쓰듯 용역을 준다. 가설 도면의 용역 대가가 구조 계산이나 공사 방식에 대한 정밀함을 해결할 방법이 될 리 없다. 속된 말로 아이들 용돈 수준으로 비용을 주고 책임은 어마어마하게 씌운다. 개별 건축사들의 하소연이 들리고, 푸념이 들린다. 하지만 개별 건축사들의 설계 용역 시장이 초토화되고 생존이 급급해진 상황에선 이런 푸념도 사치다.

이는 비단 가설 도면 용역만의 일이 아니다. 준공 업무 대행은 어떤가? 최근에는 해체 감리도 제도화됐다. 건축사들의 업무 영역이 늘어난 듯 보이고, 역할 또한 점차 강화되고 있다. 그만큼 책임에 대한 부분도 커졌다. 인허가 공무원의 역할까지 위임받는 중이다.
문제는 이런 제도들이 만들어질 때 대가에 대한 논의는 전무하다는 점이다. 대한건축사협회의 현 집행부도 정당한 대가에 대해 누차 요구해왔지만, 정부뿐 아니라 전국 지자체에서는 여전히 모르쇠다.

심지어 수의계약을 조건으로 지역 건축사에게 갑질을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말도 안 되는 수의계약 금액을 주면서 용역기간은 무한정으로 늘어나고 담당 공무원의 마음에 따라 수시로 상황이 바뀌는 일도 허다하다. 건축 부서가 아닌 타 부서들이 직접 발주를 내리는 경우도 상당한데, 여기저기서 심각한 갑질이 벌어지고 있다. 일하는 와중에 업무가 중단돼버리는 경우도 큰 문제다. 수의계약 정산은? 말할 수 없을 정도다.

더 놀라운 점은 대가 산정 시 직접인건비의 경우 노임단가는 ‘엔지니어링 노임단가’를 준용한다는 것이다. 아직 건축사와 건축사보만의 기준 대가가 마련되지 않았는데, 업무 고유속성을 반영한 기준을 별도로 만들어야 한다. 건축사들이 겪고 있는 불공정은 이 같은 일상화된 갑질과 취약한 제도적 기반에 기인한다. 혹시 주무부처뿐만 아니라 행정부는 건축사를 재능 기부 직업쯤으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