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 죽어가다

2020-06-01     함성호 시인

왕은 죽어가다*

- 황병승

그러나 나의 악기는 아직도 어둡고 격렬하다

그대들은 그걸 모른다, 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구나

그때 그대들을 나무랐던 만큼 그대들은 
또 나를 다그치고
나는 휘파람을 불며 가까스로 
슬픈 노래의 유혹을 이겨내고 있는데

오늘 밤도 그대들은 나에게 할 말이 너무 많고
우리는 함께 그걸 나눠 갖기는 틀렸구나, 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구나

불의 악기며 어둠으로부터의 신앙(信仰)……
그렇다, 나는 혼돈의 음악을 연주하는 
대담한 공주를 두었나니
고리타분한 백성들이여,
기절하라! 단 몇 초만이라도

내가 뭐, 라는 말밖에 나는 할 수가 없구나

저기 붉은빛이 방문하고 푸른빛이 주저앉는다,
라는 암시밖에는 할 수가 없구나.

* 이오네스코의 희곡 제목

 

-「여장남자 시코쿠」황병승 시집
   문학과지성사 / 2012년

서구 낭만주의 이래 문학, 특히 시는 하위문화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갖는다. 어쩌면 문학의 몰락을 예고하는 이 반동적인 사조는 이전까지 문학이 견지했던 전위를 가장 낮은 곳으로부터 끌어내려 거기에서 새로운 경향을 도출해보고자 했던 시도였다. 한국에서는 황지우 이래, 유하의 ‘키치’가 나타났고, 2000년대 황병승의 젠더 트랜스적인 사유가 등장했다. 소위 ‘미래파’의 문을 연 이 시집은 많은 논란을 낳았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내가 뭐,” 뭐든, 할 말은 항상 그것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