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담는 동네건축

2020-05-18     최이선 건축사 건축사사무소 예인<강원도건축사회>
최이선 건축사

문화와 자연과의 경계를 이분법적으로 그을 수 없듯이 건축과 지역성은 건축작업을 하면서 절대 분리할 수 없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대관령 너머 동해바다를 접하고 있는 이곳 지역에서는 경관에 담겨있는 시간의 켜를 벗겨내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지역에 기반을 둔 건축사들의 작업은 자연스럽게 지역성이 자신의 건축작업에 표현되어지고, 그 지역의 문화를 담아내게 된다.

물론 이러한 경관을 대하는 반복된 자세는 건축작업을 하면서 초기컨셉 작업의 탄탄한 바탕이 된다. 지역성과 문화 그리고 기억이 함축된 동네건축은 대자연에 점을 찍는, 작지만 거대한 일의 초석이고, 이것이 모여 문화가 되고 경관·자연의 일부가 되는 중요한 일이다. 자연의 이해와 수용작업을 쉼 없이 하는 지역 건축사들의 작업이 세상의 변방이 아닌 중심이 될 수 있음을 2012 프리츠커상 수상자 중국의 왕슈 그리고 올해 수상자인 아일랜드 그래프턴 아키텍츠의 이본파렐&셸리 맨나마라가 보여주고 있다.

건축사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행할 수 있는 건축을 통한 나눔의 방식은 다양하다. 나의 경우 건축사의 역할에서 디자인 작업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은 기본이고, 건축을 통한 교육, 그리고 시민과 함께하는 건축 프로그램을 통해 건축사의 또 다른 사회적 역할을 행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봉사차원을 넘어 변하지 않는 건축의 사회적 소명과 가치를 지키기 위한 것, 건축사이자 지역 공동체의 전문가로서 해야 할 역할과 참여라고 본다.

내가 ‘건축교육’에 참여하는 방식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마을학교인데 ‘아이 하나를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의 격언처럼 마을공동체가 함께 아이들의 미래를 고민하는데 참여한다. ‘강릉청소년마을학교-날다’ 프로그램은 지역의 초·중·고 학생들에게 강릉지역의 건축문화와 역사를 탐방, 체험할 수 있게 하는 교육이다. 또 하나는 ‘K12 건축학교’로서 건축사들이 교육의 혜택을 받기 어려운 학생들에게 건축교육을 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건축교육이 지역문화재단과 연계해서 더 많은 학생들에게 혜택이 주어지도록 노력하고 있다.

‘시민과 함께하는 프로그램’은 강원건축문화제 프로그램 중 하나인 ‘건축사와 함께하는 골몰길 투어’다. 기존 명주동 마을해설사와 함께 강릉의 구도심을 걸으면서 건축이야기를 나누며, 시민들의 건축 관련 궁금증을 풀어주고 마을해설사로서 부족할 수 있는 건축지식을 채워준다. 그리고 도시재생과 문화가 접목되는 문화적 도시재생 사업에선 집수리 아카데미를 통해서 구옥에 사는 시민들이 스스로 집수리를 할 수 있도록 관련 기술을 집수리 공종별로 가르쳐주고, 실습을 통해서 공구와 친숙해져 이런 활동을 통한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건축사의 전문적인 지식과 지역의 이야기를 접목한 ‘도시탐사대’는 자신이 사는 동네를 다시 한번 탐구·체험할 수 있도록 건축사가 탐사 대장으로서 시민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기억하고 있는 건축과 도시이야기들을 전달해 소통한다.

‘기억을 담는 동네건축’이란 앞서 말한 활동들처럼 시민과 함께 건축에 대한 생각을 공유·소통하는 작업이 아닐까. 이를 통해 건축이 세상과 경계를 허물고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일은 다름 아닌 지역 건축사가 해야 할 역할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