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20대, 설계를 막 시작할 때였다. 계단을 오른쪽으로 돌아 올라가게 할 것인가? 아니면 왼쪽으로 돌아야 하는가? 열띤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심지어 미서기 창의 문짝이 어떤 쪽을 안으로 할 것인가가 문제로 되었다. 육상경기에서 운동장을 돌 때는 시계 반대 방향, 곧 오른쪽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것도 원래 그리스나 로마에서는 반대로, 시계방향으로 돌았다고 한다. 이것을 근대 올림픽에서 처음으로 거꾸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했을까?

고려 때까지만 해도 오른쪽을 옳은 것 -다수로, 왼쪽을 그른 것 -소수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정승도 우승상이 높았고 좌승상은 낮았다. 이것은 서양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우파는 다수당이며 옳고, 좌파는 소수당이며 급진파로 치부되었다. 이것이 조선조에 들어서면 모든 의례는 동입서출(東入西出)로, 곧 동쪽으로 들어가서 서쪽으로 나오는 것으로 바뀌었다. 정승도 좌정승이 높고 우정승이 낮은 것으로 정리되었다. 이것은 조회를 설적에 임금님 입장에서 보는 것이니, 동쪽이 왼편으로 된다. 따라서 문관이 동쪽에 섰고 무관은 서쪽에 섰다. 조회란 문자 그대로 아침에 서는 것이기 때문에, 동쪽으로 마당에 들어서면 동쪽 회랑 그림자를 밟고 들어가며, 서쪽에 서 있는 무관들은 아침 햇살을 받아 얼굴을 찌푸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모습은 왕릉 앞에 서 있는 문관과 무관의 얼굴을 비교해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 동구릉 건원릉 앞에 서 있는 문관과무관의 석상(한국학중앙연구원)
▲ 건원릉의 문인석(사진 좌)과 무인석(사진 우)

그렇다면 왜 조선조에 와서 갑자기 바른쪽이 아닌 왼쪽을 높였을까? 조선조에서 東入西出을 고집한 한 이유는 천문도(천상열차지도)에서 하늘이 그렇게 운행한다고 관찰했기 때문이다. 곧 지구 뿐 아니라 태양계 행성의 자전은 모두 시계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나라 주택이나 사찰은 동남쪽 모퉁이에 대문을 두는 경우가 가장 많다. 서울의 속설에 ‘동대문에 남향집’이란 말은 여기에서 연유한 것으로, 양택론에서 이런 집을 ‘동사택(東四宅)’이라고 한다. 남향은 8괘에서 감坎(수水)에 해당하며 남동방은 손巽(목木)에 해당하여, 상생의 방위인 까닭이다.

고려 때는 탑돌이를 할 때나 집돌이(요잡 繞匝)를 할 때도, 모두 시계 방향으로 돌았다. 그런데 갑자기 반대 방향으로 돌아야 하니, 절집 의례에서 혼란이 올 수밖에 없었다. 서산 개심사를 보자. 집 앞 밖에 가로로 기다랗게 영지(그림자 못 - 자신의 업을 드려다 보는 거울)를 두고 서남쪽에서 들어간다. 고려 때 같으면(개심사는 백제 때 이미 계획된다) 서남쪽에 대문을 둬도 되지만, 동남쪽으로 대문을 내기 위해는 누마루를 낮게 만들고 그 옆에 조그만 대문을 만들어서 그쪽으로 유도하고 있다. 사람들은 괜히 바깥마당을 가로질러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절집에서 이렇게 작은 사주문을 별도로 두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또한 중문을 들어선 신도가 대웅전 동문으로 들게 하기 위해서는, 대웅전 집굽(기단) 가운데 디딤돌(계단)을 없애 버리고, 마당 왼 켠 요사채를 따라 들어가면 그 뒷채가 동문으로 유도하도록 얼굴을 내밀어 손짓하고 있다. 처마의 서까래 모습을 보면 우리에게 어떤 암시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 대웅보전과 무량수각 사이 계단-대웅전동문으로 유도하는 여러 암시들을 볼 수 있다.
▲ 개심사 해탈문(안양루 옆)

구례 화엄사의 경우는 원래 중문이 각황전과 축을 맞추어 남쪽에 있었다. 이것을 마당의 왼쪽 모퉁이 진입으로 바꾸려고 하니, 그곳은 지형 상 너무 어려웠다. 신도들이 집 뒤에서 들어와, 집 앞을 한 바퀴 돌아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똑같은 이름의 전각인 대웅전을 (각황전과 같은 뜻으로, 부처님 이름이 10개가 있다) 새롭게 세우고 남쪽 정면을 바꾸었다.(각황전에 이미 석가모니 불이 모셔 있는 까닭에 대웅전에는 화엄불인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다) 이렇게 하고 보니 마당의 서남쪽 모퉁이에 있던 출입구가 보제루 동남쪽 모퉁이로 바뀔 수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대웅전이 서 있는 축대는 각황전 앞 석축보다 100년은 늦게 쌓은 것이며, 그 뒤의 대지도 흙을 판축하여 새롭게 조성한 것이다. 필시 대웅전 앞 계단은 비대칭의 4간으로 증축되었고, 5층 석탑도 옮겨졌다.

▲ 구례 화엄사 보제루
▲ 화엄사 대웅전 전경

순천 선암사를 보면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을 아우르려고 했던 의천의 천태종 교리에 따라, 중앙에 신도들을 위한 대웅전을 두고 왼쪽에는 선종을 오른쪽에는 교종의 전각을 배치했다. 여기서도 외대문은 절집 밖에 누마루(승선루)를 두고, 절집에 들어오는 중문은 삼문이 아닌 일주문 형식으로 만들어진다. 대웅전 앞마당에는 유가계의 3층 석탑이 쌍으로 놓여 있는데, 이로 미루어 천태종도 유가계 -통일신라 특유의- 석탑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그런데 이것이 비뚤어져 세워졌다. 얼마 전 석탑을 보수할 때, 아마도 오래 돼서 자연히 비뚤어졌거나 아니면 당시 사람들이(고려, 조선조 때 2번 보수 - 사리함의 유물로 알 수 있었다) 측량을 잘못한 것이 아닐까 의심해서 고치고자 했으나, 내가 극구 반대해서 그대로 보수했다. 이렇게 출입구를 바꾼 예는 엄청 많다. 고창 선운사나 통도사도 마찬가지이다.

▲ 순천 선암사 선종 계(사진 좌), 교종 계의 공간 배치(사진 우)

양산 통도사의 경우 원래의 출입구 대문은 대웅전 서(오른)쪽에 있었다. 개울을 따라가다가 지금 참선(템플 스테이)방에서 꺾어 들어가도록 계획되었는데, 출입구를 현재 일주문이 있는 동(남)쪽 모퉁이로 옮겼다. 그러다 보니 초입의 영산전 앞마당에 있던 신라 때의 3층 석탑을 일주문 쪽으로 옮겼던 것인데, 근자에는 이것을 다시 원래의 자리인 중앙에 옮겨 놓고 말았다. 무지의 탓이랄까.

저작권자 © 대한건축사협회 건축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