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시(詩)나 음악에서 율동 구성은 흔히 4매듭으로, ‘기승전결(起承轉結)’이라고 한다. 흥을 일으키고 이어가다가 굴린 다음, 마지막 극적 절정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물론 조금 복잡한 시나 음악은 7단계인 기승요포서전결(起承腰鋪舒轉結)로 이루어지기고 한다. 옛 선인들은 이것을 사람 몸의 형상과 비유하는데, 기승은 팔 다리이고 요는 허리이며 포서는 몸통과 가슴, 전결은 목과 머리에 해당한다. 허리와 목은 가늘어서 굽고 굴려야 하며 포서는 넓게 펼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짧게는 하나의 긴장하는 목을, 길게는 허리와 같은 2개의 길목을 만든다는 것이다.

건축 공간에서 일으키는 요소를 통상 사람의 입과 같이 어귀라고 하는데, 마을이나 집의 어귀(洞口)에는 몇 개의 상징물이 세워진다. 서민 마을(자연취락)에서 가장 많은 것이 장승이고, 양반마을(집성촌)에서 많은 것은 비석과 비각일 것이다. 장승과 비석은 마을 입구에 덜렁 하나만 있는 경우도 있지만 어귀 길을 따라 줄지어 선 경우도 있다. 봉화의 닭실 마을에서는 청하동천이라는 골자기 이름을 어귀에 새겨 두기도 한다.

▲ 경기도 광주시 엄미리 장승(경기도광주 공식블로그-러브인클린 광주)
▲ 조천비석거리-제주 조천리(문화재청)

집의 초입 어귀에는 반드시 지방돌을 놓아 구분한다. 가로로 놓인 이 돌은 단순하지만 외부와 내부를 가르는 상징물이 된다. 여기에는 기능상 말을 탈 때 이용하는 말팡돌과 어귀를 상징하는 어귀돌, 혹은 부자집인 경우 대문간을 두기도 한다. 소쇄원에는 지방돌과 그 옆에 파초를 심어서 어귀돌을 대신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어떤 이는 이 지방돌이 자동차가 출입하는데 방해 된다고 없애자는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 안국동 윤보선가 대문간 앞의 말팡돌(문화재청)

외부에서 어귀에 이르는 각도도 중요하다. 한국에서는 중국처럼 일직선 축을 쓰지 않는다. 지나가는 동선의 길이 있고 여기서 각을 이루면서 어귀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물론 앞길이 지나칠 수가 있기 때문에 솟을대문을 만들어 강조를 한다던가, 혹은 양쪽 담장을 엇갈리게 시설해서 받아주는 공간을 만들기도 한다. 이런 기법은 일일이 열거하기에 딱할 정도로 다양하다.

시작 다음은, 이어가는 공간이다. 음악에서는 도입부에 해당하는 바, 우리 건축에서는 담장이 가장 많이 쓰인다. 소쇄원처럼 한쪽 담장을 미끈하게 끌어가면서 반대쪽은 숲으로 거칠면서 부드러운 거품 같은 텍스츄어를 쓴다. 제주처럼 올래 고샅을 쓰기도 한다. 이때 올래의 폭은 한발(사람의 키 높이)이며 담장의 높이도 같다. 폭이 넓어지면 담장도 높아지고 좁아지면 마찬가지로 담장 높이도 낮아진다. 대략 골목의 폭과 담장의 높이는 같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 집의 벽체를 활용하기도 한다. 창이 있더라도 작게 만들어서 벽체의 둔한 느낌으로 한쪽을 막으면서 출입자를 밀어준다. 대표적인 경우가 양산 통도사의 진입 부분일 것이다. 일주문에서 불이문을 지나 대웅전에 이르기까지, 지세가 약한 왼쪽 개울 쪽은 건물을 등지게 앉혀서 시선을 무겁게 차단하면서 안쪽으로 밀어 넣는다. 원래 통도사의 입구는 서(남)쪽 개울을 따라 올라가다가 개울이 틀어져 돌아가는 곳 - 통도사 대웅전과 직교되는 축선 상에 출입구가 있었는데, 지금은 이것을 없애 버리고 멀찍이 동쪽에 일주문을 새로 만들어서 이쪽으로 먼 길을 끌고 들어오고 있다. 일주문에서 불이문까지가 도입부이고, 불이문을 들어서는 순간은 절정공간에 이르도록 계획되었다. 긴 마당 양쪽에 열주가 서 (퇴가) 있는 건물을 세우는 것은 공간에 거리감을 두기 위한 방법으로, 이어주는 공간이라기보다는 3차원의 공간감을 주는 본론에 가까운 공간 처리이다.

▲ 통도사 불이문(문화재청)

이외에도 바닥에 박석을 깔아서 유도하는 방법도 흔히 쓰인다. 정(丁)자각이 있는 왕릉이 대표적인 경우인데, 앞에는 홍살문을 세워서 이곳부터 경계가 되는 곳임을 암시한다. 왼쪽 대기석(관덕대 등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있다)에서 출발하면 줄 맞춰 깐 박석을 따라 유도된다. 이 박석은 다듬질 않은 혹두기로 투박하다. 궁궐 정전 앞 박석은 빛이 반사되어 눈부실까 봐 혹두기로 하지만, 여기서는 고개를 들지 말고 땅만 보고 조심스럽게 걸으라는 의미를 지닌다. 통상 어도의 복판은 임금 혹은 신이 들어가는 어도이고 동쪽의 협도는 이를 모시는 유사가 뒤따라가는 길인데, 이것이 한쪽에만 시설되어 있다. 좌우 대칭이 아닌 것이다. 와! 상상하기 어렵다. 신하는 들어갈 때나 나올 때도 동쪽 한쪽에서만 시중을 든다는 말일까? 아니면 나올 때는 의례를 적당히 함으로 한쪽을 생략한 것일까? 어도 옆 양쪽으로 협도를 만들면 복판 어도보다 유사가 쓰는 길이 더 넓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 건원릉의 신도와 어도(네이버 백과사전-엔사이버)
▲ 향사반차도설(명지대학교 부설 한국건축문화연구소, 함춘원지 주변 유적 시굴조사 보고서, 2006)

최근 지방의 서원, 향교, 사당 등에서는 자기 집의 가세를 자랑하기 위해, 박석을 다듬어서 넓게 까는 경향을 본다. 이렇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경건한 선조님을 모시는 공간인데도 불구하고, 고개는 쳐드는 것은 물론이고 삼삼오오 모여서 시끄럽게 말을 하면서 들어온다. 경건한 공간은 일시에 호텔 로비처럼 접객공간으로 변화하고 만다. 예전에 왜 혹두기 돌을 일부러 깔았을까? 고개를 숙이고 겸손한 태도로 선조를 만나로 들어오라는 것이다. 오늘날 자기 집 사당에 선조가 진짜 계실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을까?

예전에는 그걸 믿었기 때문에, 선조도 복록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고 지금은 믿지 않으니 선조님의 힘도 빠졌다. 굿발도 믿는 사람에게만 영험이 나타난다.

어도가 민간 주택에 들어오면 올래의 담장을 따라 유도되는 다리팡돌(담장 아래 줄 맞춰 깔아 논 돌)이 되고 혹은 징검돌(飛石)로 마당을 건너기도 한다.

▲ 올래의 길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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