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 입국

함성호 시인l승인2019.12.04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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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 입국

- 배영옥

 

공항엔 열대성 소나기가 내리고 있었다
시외버스 정류장처럼 소란스러운
소나기들의 집합소,
매끄러운 피부를 만지작거리며
뜨거운 공기 속을 떠도는
휘발유 냄새는
그리운 한 생을 돌이키는 듯했다
모든 게 조금씩 낡아 있었다
건물도, 간판도, 사람도
낡음의 미학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낡음이
동의를 바라는 것도 아닐 것이다
낡아서 아름답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수치를 감내해야 하는지
낡음은 추함과 동음이의어처럼
세월에 따라 늙어가는 것
그날 내가 느낀 건 그리움 속에
숨어 있는 수치를 보아버린 것
날짜변경선을 넘어
내 안의 수치와 마주하는 순간
이미 나는 조금씩 낡고 병들어
희미해지고 있었다

 

-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 / 문학동네 / 2019년

“휘발유 냄새는 그리운 한 생을 들이키는 듯했다”라는 문장에서 갑자기 ‘모든 것이 정지했다. 모든 것이 정지했다’라는 말은그 순간에 모든 전체가 환기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환기’는 나의 생을 포함해 너의 모든 것까지를 아우르는 말이다. 그리고 텅 빈 어떤 것과 그 때. “숨어 있는 수치”까지 보아 버린 생의 순간, 나는 이 세상에 없어도 괜찮다. 그리고 그렇게 배영옥 시인은 여기에서 저기로 넘어 갔다. 죽음의 문장이란 이런 것인가? 시인은 그 길을 걸어 죽음에 입국했다. 2018년 6월 11일이었다.

 

함성호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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