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없는 세상
- 장정일

고추잠자리가 몰려다니는 흰 등대
풍뎅이가 기어가는 방파제
입이 쩍 벌어지도록 하품을 하는 수평선
누군가가 바람에 날려 가지 않게
자신의 밀짚모자를 한 손으로 꾹 누르고 있다

헤드라이트가 수분을 섭취하는 숲
경적을 울리자 갑자기 나타난 저수지
아코디언을 켜는 애인이 사는 마을
화투장에 흠집을 내는 도박꾼처럼
시인은 자신이 고른 말에 침을 바른다

달짝지근한 냄새를 풍기는 극장
트위터를 보고 몰려든 식당
벤치가 모자라는 공원
주인을 끌고 다니는 포메라니안
도시는 쉬지 않고 쌓이는 인내
새로 생겨나는 질병

고소한 양고기 냄새가 가득한 주방
욕실 앞에 떨어져 있는 팬티
창 안을 훔쳐보는 붉은 데보시아나
대낮에 하는 두 남자의 섹스
이 모든 것이 보기에 좋지 않은가?

오, 빨리 사라져 버려라
나는 사라져 버려라
내가 없는 완벽한 세상
내가 없으면 더욱 아름다운 세계!


-『눈 속의 구조대』장정일 시집 / 민음사 / 2019년
이 지구상에서 인간이 이토록 번성함을 누리는 것은 이기적인 본능을 제한하고 사회성을 강화한 덕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제도와 규범을 통해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사회의 요구와 일치시켰기 때문이다. 근대는 그것을 보편적으로 강요한 결과다. 우리는 이 사회의 일부분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나의 일부분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를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거기에서 내가 없어도, 내가 없어서 더 아름다운 세상은 어떨까? “내가 없으면 더욱 아름다운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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