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상용(體相用)’이란 불교 화엄학의 기신론(起信論)에서 말하는 큰 세 가지를 말하는데, 체는 실질, 본질을 말하고 상은 체에 의지해서 나타난 현상을 뜻하며, 용은 체와 상의 인연에 따라 활동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체는 하나이고 절대이며, 무한한데 반해 상은 하나가 아니고 상대이며 유한하다고 한다.

▲ 경복궁 배치도(경복궁복원정비기본계획보고서, 문화재관리국, 1994)

경복궁의 전묘(前廟) 공간을 비교해 보면, 근정전은 장대해 보이지만 의례 때만 사용하여 외부에 형상을 드러내는 상(相)의 공간이며, 근정전 뒤에 배치되어 있는 사정전은 작지만 임금이 평소에 정무를 보는 체의 공간이다. 근정전을 두르고 있는 회랑과 전면의 여러 문들은 모두 용의 공간이며, 광화문로 양쪽에 늘어서 있었던 육조거리도 용의 공간에 속한다.

체상용은 사람과도 흔히 비교하여 설명하는데, 체는 공간의 주체이므로 사람의 머리처럼 뒤(위)에 있지만 크기는 작고 오밀조밀하다. 반면에 상은 몸통으로 장대하고 우람하며 맷집이 있어 보이므로 외부에 드러내는 외형의 공간이 된다. 용은 손과 발로서 체와 상을 둘러싸고 있으면서 다용도가 된다. 이것이 체상용 이론에 따라 집을 계획하는 이론이 된다.(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계명대학교 이중우 명예교수의 저서가 있다.

사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고대 가람은 중앙에 금당을 두고 그 앞에 탑을 세운다. 이것이 절집의 얼굴이 되는 상(相)이다. 그러나 금당 뒤에는 강당인 설법전을 두고 그 뒤쪽에 조사의 탑인 승탑이 배치되는데, 이것이 절집의 머리(체)에 해당한다. 금당의 좌우로 혹은 앞으로 회랑, 문 등의 부속건물이 들어서서 절이 기능토록 하는데 이것이 용(用)에 해당한다.

▲ 불국사 대웅전
▲ 불국사 자하문

신유교라고 불리어지는 성리학(양택론)에서는 이것을 차용하여 양택론에서 체와 용으로만 설명한다. 안채는 집의 본질이므로 체라고 하고 사랑채는 외부 손님들이 들락거리는 장소이므로 용이라고 설명하지만, 여기에 딸려 있는 행랑채에 대해서는 별도의 말이 없다. 모두 용에 속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또한 불교의 화엄학과는 달리, 성리학에서는 체가 커야 하며 용은 작아야 한다고 주장하여 항상 안채가 사랑채보다 크도록 계획해야 하며 사랑채가 안채보다 용마루가 높거나 집의 규모가 커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사랑은 사람이란 의미로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 ‘인(人)’이란 뜻을 지닌다) 이 이론은 조선 전기까지 잘 지켜져서 반드시 안채가 크며 심지어 사랑채는 아래채라고까지 불리어졌다. 임진란 전까지는 안채가 전면에서 잘 보이지 않더라도, 사랑채보다는 용마루가 높고 집의 규모도 컸으며 안채에 그 집의 주된 세대(부부 포함)가 살았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바깥주인이 사랑채로 나 앉게 되고, 주부의 재산권이 낮아지며 사랑 기능의 중요도가 높아진다.(이를 접빈객(接賓客)이라 한다) 이것은 상업을 중시(중상주의)하는 조선 후기의 사회사상이 바뀌어졌음을 의미한다. 즉 억음양양(抑陰揚陽)의 미학이 발생하는 것이다.(이것은 다음에 다시 다루기로 하자)

봉화의 송석헌 배치도를 보면 안채가 사랑채보다는 뒤쪽에 있지만 크고 용마루가 높게 계획되어 있어서, 안대청에 앉아 사랑채 용마루 위로 햇빛이 안마당까지 쏟아지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안마당(봉당)이 작더라도 채광과 통풍이라는 기능을 충분히 할 수 있도록 고려되었다. 그러나 사랑마당에서 볼 때는, 사랑 뜰팡(기단 축대)을 높게 쌓아서, 비록 사랑채가 안채보다 크지 않지만 집의 얼굴처럼 규모 있게 낯빛을 내세우고 있다. 성리학에서 말하는 체용의 이론을 깨뜨리지 않으면서도 교묘하게 상의 얼굴을 크게 내세우는 체상용의 이론을 원용하고 있는 것이다. 양택론에서는 여전히 체용의 이론을 주장하고 있는데 현실은 저만큼 앞서서 체상용의 이론을 받아 드리고 있는 것이다.

▲ 송석헌 전경
▲ 송석헌 사랑채 전경
▲ 송석헌 건너채 횡단면도

이 이론을 똑같이, 불란서의 신 꼴뷔제 학파의 시리아니는 설파한다. 건축 공간에는 특별 공간(體相)과 보통 공간(用)이 있다는 것이다. 보통 공간은 어디나 있는 일상적 공간이므로 행랑처럼 평범하게 기능적으로만 풀면 되지만, 특별 공간은 한 건물에만 있는 독특한 기능이므로 이것을 형상화하여 건물에 개성을 불어넣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의 도그마에 가까운 이론은, 꼴뷔제의 건축을 분석하여 동양 사상의 체용 이론으로 풀어낸 것이다. 필경 이론도 간결하고 설계도 읽기가 쉬워진다. 그러나 그도 화엄에서 주장하는 체상용의 이론은 들어보지 못 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에게 직접 수학해 본 적은 없지만, 그가 설파한 여러 가지- 예를 들면 공간의 켜에 관한 내용, 음악적 공간의 연속성 등-가 꼴뷔제가 말하고 있는 건축이론이 그러하듯, 지극히 동양적인 건축이론과 지극히 유사함을 본다. 이런 몇 가지 내용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서양 건축도 디자인의 원리는 우리와 지극히 같으며, 비록 우리와 다른 건축 재료와 구법을 이용했더라도 더 다양한 형식을 이미 경험했음을 본다. 따라서 그들의 우리와 다른 건축적 경험- 고층화, 대형화, 나무가 아닌 무기질 재료의 구조법 등 -을 우리의 정서에 맞도록 재해석하여 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건축을 비교적 평면적으로 늘어놓는데 비해 서양에서는 이것을 좁은 도시 안에 집어넣어야 했음으로 수직공간으로 바꾸었음을 본다. 대지의 분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주택이 가로로 길지만 그들은 세로로 길 수 밖에 없는 도시적 맥락이 있다. 우리도 이제 가로로만 긴 상자곽 모양의 아파트가 아니고 세로로 긴 탑상형 아파트의 탄생이 시작된 것이 아닌가? 그러나 다시 한 번 뒤집어서 반성할 필요가 있다.(다음 기회로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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