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醉不歸
- 허수경

어느 해 봄 그늘 술자리였던가
그때 햇살이 쏟아졌던가
와르르 무너지며 햇살 아래
헝클어져 있었던가 아닌가
다만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은 없다 

마음들끼리는
서로 마주 보았던가 아니었는가
팔 없이 안을 수 있는 것이 있어
너를 안았던가
너는 경계 없는 봄그늘이었는가

마음은 길을 잃고
저 혼자
몽생취사하길 바랐으나
가는 것이 문제였던가, 그래서
갔던 길마저 헝클어뜨리며 왔는가 마음아

나 마음을 보내지 않았다
더는 취하지 않아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길이
날 묶어
더 이상 안녕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나
더 이상 안녕하지도 않았다

봄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나 울었던가
울기를 그만두고 다시 걸었던가
나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만 없다


-『혼자 가는 먼 집』허수경 시집
   문학과지성사 / 2000년
일년을 태양의 황경(黃經)에 따라 24등분하여 계절을 꼼꼼히 나눠 절기를 둔 것은 참 잘한 일이다. 압구정에 사무실을 두고 일하는 한 건축사는 적당한 절기 때마다 불러 술잔치를 베푸는데 거기에 모인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모르지만, 나는 맨 정신으로 그 사무실을 나온 적이 없다. 불취불귀(不醉不歸)-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못하리. 누가 이런 규칙을 정해 둔 적은 결코 없다. 다만, 보내지 않은 마음이 저절로 그 자리에서 머물고 있을 뿐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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