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생산된 지 27년 된 자동차를 새 주인에게 보냈다. 내가 중학생시절부터 인연을 맺었고 10여 년 전부터는 나의 출퇴근 차량으로, 몇 년 전 부터는 세컨카로 운행하던 추억 많은 차였다. 나이가 들어 꾸준히 관리를 해줘야 하지만 차가 방치되는 상황이 계속 되어, 이대로 두었다가는 명이 다할 것 같아 보내기로 결정했다.
아무에게나 보낼 수 없어 인터넷 커뮤니티에 글을 올리고 열 명이 조금 넘는 구매의사자들과 연락을 주고 받으며, 일종의 ‘면접’을 보았다. 새로운 주인은 고향에서 부모님과 농장을 운영하고 있는 30대 초반의 청년이 되었다. 해당차량의 정비 매뉴얼북과 프라모델을 책상에 올려두고 언젠가 인수할 날을 꿈꾸고 있었다는 누가 봐도 영락없는 ‘소년’이 적임자로 나타난 것이다. 무사히 인수를 하고 돌아오자, 가족 중 누군가는 “정 많이 들었는데 아쉽다. 가져간 이에게 이러이러한 부분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 줄걸 그랬다”등의 서운한 마음을 표현했고, 또 누구는 전날 밤 차를 보내며 눈물 흘리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새 주인이 될 사람의 ‘면접’을 보고 계약된 차를 정비소에 가서 다시 한 번 정비하고 세차까지 해서 보내는 내 마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 일을 겪으면서, ‘과연 나는 누군가에게 이 정도 애착이 생길만한 집을 설계해 줄 수 있을까?’, ‘이미 내가 설계한 주택의 건축주들은 언젠가 그 집을 보내게 될 때 이런 마음이 들까?’ 라는 자문을 하게 됐다.
한 집에서 일생을 보내는 일이 사라졌지만, 언젠가 되 팔수도 있다라는 전제를 가지고 주택설계의뢰를 하는 분들보다는 적어도 이 집에 사는 동안만큼은 나의 집이니 나에게 꼭 맞는 집을 짓겠다고 의뢰하는 분들의 주택 설계가 훨씬 매력적이다. 지속적인 유지보수와 ‘운’이 수반되어야 하지만 단독주택의 수명을 300년 정도로 예상하고 설계한다. 이론상 적어도 집 주인이 6번 이상, 많게는 10번 이상도 바뀔 수 있다. 첫 번째 거주자는 내가 선택할 수 있다 하여도, 훨씬 더 많은 추후의 거주자는 어찌 보면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결정 될 것이다. ‘소년’처럼 훌륭한(?) 제2의, 제3의 집주인이 나타나면 좋겠으나 그에 앞서, 오랜 세월을 버티어 낼 수 있도록 설계했는지 자문해 본다. 계절마다 한 번씩은 내 손이 간 주택에 다녀가리라 마음먹었었지만 건축주와의 관계, 바쁜 일정, 설계의도와 다르게 훼손되었을 때 받을 상처 등 게으름에서 나오는 핑계거리들을 앞세워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무형의 가치에 대하여 대가를 지급하는 것에 인색한 사회에서 작업한다는 핑계로 소홀히 하는 것들은 없는지 돌아본다. 공장에서 똑같이 찍어내는 공산품인 자동차에도 애착을 가지는데, ‘세상에 하나뿐인 누군가의 집’을 나는 어떤 태도로 작업하고 있을까? 자동차도 건축물도 결과물은 유형이지만, ‘추억’, ‘애착’과 같은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가치가 무형임은 물론이고, 나의 작업은 건축주 개인의 삶에, 나아가 공공에게 어떤 무형의 가치들로 기여할 수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저작권자 © 대한건축사협회 건축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