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사회구성원의 합의와
동의를 전제로 하고
규제 이전에 실효성(實效性)의
문제를 먼저 검토해야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은 왠지 바쁘고 부산하다. 그래서 그런지 신호등 앞에서 잠시 기다리는 시간도 조바심이 난다. 가끔, 깊은 밤 운전을 할 때 점멸등으로 바꿔도 될 것 같은 작은 네거리의 신호등 앞에 서 있노라면 누가 뒤에서 내 차를 받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백미러를 주시하게 된다. 또 교외 한적한 도로의 빨간 신호등 앞에서 정지하고 있을 때 이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내 차를 스쳐지나가는 차량을 보며 불쾌감을 느끼곤 한다.
요즘에는 원활한 교통의 흐름을 위해 회전교차로가 많이 생기는데 점멸등이나 회전교차로 모두 보행자 우선과 양보운전을 전제로 한다. 신호등이 법(法)이라면 점멸등이나 회전교차로는 현실을 반영하고 사회적 합의하에 이루어진 일종의 자율적 개념이다. 이렇듯 회전교차로는 잘만 운용되면 신호등 없이 교차로를 지나는 것으로 신호등이 오히려 교통의 흐름을 방해할 수 있다는 개념에서 출발한다.
지난 7월 입법예고 된 「3층 이상 필로티구조 건축물 설계․감리 시 관계기술자의 협력을 의무화」한 건축법시행령이 12월 4일부터 시행되었다. 우리 협회는 입법예고 기간에 이 법의 부당함을 역설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예부터 ‘법은 흐르는 물과 같다’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다’라고 하여 법의 공정한 운용과 법은 지켜야한다는 것을 본령(本領)으로 한다. 그렇기에 법은 사회구성원의 합의와 동의를 전제로 하고 규제 이전에 실효성(實效性)의 문제를 먼저 검토해야한다.
그런데 이번에 시행되는 건축법 시행령은 현업에 종사하는 건축사의 의견을 무시하고 현실을 도외시한 규제의 덫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존의 내진설계 강화, 필로티 건축물의 구조 설계 가이드라인이 있고 대한건축사협회에서 지진에 대한 감리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을 같이 하고 있는 이 때 시간을 갖고 현장의 노력을 지켜본 후에 시행해도 늦지 않은데 서두르는 느낌이다. 이보다 먼저 지진에 취약한 필로티 건물이 왜 양산되는지에 대한 고찰과 건축공사 현장의 체질 개선 즉, 시공자 및 건축주의 인식의 전환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법 이전에 국민 스스로가 자연재해에 대한 경각심을 갖고 안전을 위해 기꺼이 비용을 지불할 마음의 자세를 갖는 것이 먼저이다. 법이 아무리 선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졌다 해도 현실을 무시하거나 옥상옥(屋上屋)식으로 절차가 복잡하고 불편하게 한다면 실효성에 의문이 간다. 시대가 복잡해졌으니 법이 많아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법이 필요한 곳에 법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법 시행으로 국민은 비용 부담이 가중되었고 건축사에 대한 불신으로 건축사는 자존감에 상처를 입었다. 이제 우리 앞에는 두 가지가 놓여 있다. 이것을 바꿀 수 있는 인내인가,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인가?

<맺는 말> 대한건축사협회 건축사신문 편집개편에 따라 저의 글은 이번호가 끝입니다.「세상에 말 걸기」로 시작하여 「일상에서 만나는 질문들」까지 5년 60회에 이르는 동안 고정 코너로 지면을 할애해 준 협회와 부족한 저의 글을 인내심을 갖고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대저 세상의 나무는 우리에게 산소를 공급하고 그 나무를 베어 만든 종이에 글을 썼다면 당연히 그 글은 읽는 사람에게 산소를 공급해야 할진대 과연 저의 글이 그러했는지 의문입니다. 새 해 새롭게 변모할 협회신문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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