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에 군에 입대하여 21세기에 전역하다.” 필자는 1999년 11월 군에 입대하여 2002년 1월에 전역하여 2년이 조금 넘는 시간을 군에서 보냈었다. 조금 편하게 군생활을 하겠다고 건설공병을 지원하여 면접과 입소대대에서 건축제도 시험까지 봤었던 기억이 있다. 군에 갔다 오면 정신 차린다고 귀가 닳도록 들었을 만큼 사고(?)도 종종 치는 그런 청년이었다. 주변의 바람이었는지 논산훈련소의 기초 군사훈련을 마치고 자대배치를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크리스마스 이브에 듣도 보도 못한 경기도 파주 서부전선 최전방에 배치됐다. 육군 건설단의 감독병쯤을 그리며 입소했던 내 상상은 모두 깨져버리고 현실은 육군 모 사단 공병대대의 일개 이등병으로 내 보직은 야전공병이었다.
이등병으로 자대 배치를 받고 중대에서는 오랜만에 신삥(신병)이 왔다고 여러 고참들이 나를 스카웃(?) 하려 했다. 총을 쏘는 것도 아니며 전차를 수리하는 것도 아니며 매일매일 막사 수리를 하러 다니는 내 2년 군생활의 보직은 ‘목공’이었다. 무탈하게 6개월 즈음 군생활을 했을 무렵 경의선 복원을 시작했고 우리는 사단장의 특별 지시로 사단 구역 내 있는 십 여개의 GP 환경 보수작업을 근 1년 동안 했었다. 그렇게 난생 처음 무장을 하고 방탄조끼를 입고 수색대의 에스코트를 받고 GP라는 곳에 처음 들어가 보았다. 이 곳에서 우리의 임무는 폭2미터, 길이 500~600미터 쯤 되는 교통호에 합판과 서포트를 대어 폼을 만들고 철근을 배근해 슬래브를 만드는 것이었다. 나는 형틀목공의 임무를 맡아 거푸집을 짜고 철근을 배근하는 일을 했었다. GP는 비무장지대 내의 요새 같은 곳으로 높이도 꽤나 높게 만들어 하루하루 인력으로 자재들을 올리는 것이 작업하는 시간보다 더 오래 걸렸었다. 무엇보다 레미콘차도 못 올라가 한 60㎥쯤 담길 만한 커다란 통에 하루 레미콘을 10대 정도 부어 놓고 전 중대원이 투입되어 고추장 말통을 지게로 지고 인력으로 올려 몇 날 며칠 콘크리트를 타설 했었다. 이렇다보니 처음에는 육안으로 북한군 GP가 보이는 곳이라 긴장도 되고 조금 무섭기도 했었지만 나중에는 총구를 겨누고 있다는 두려움도 없어졌고 북한군이 보이는 곳에서도 벌렁벌렁 누워 휴식을 취했었다. 그 이후로 내 군생활의 대부분은 GP에 들어가 낡은 천장도 걷어내어 텍스로 교체하고 침상도 새로 놓고, 문와꾸에 문짝도 새로 만들고 점점 기술이 일취월장 해졌다. 때로는 용접할 부분이 있으면 용접기도 챙겨가 용접도 해주고 페인트칠까지 내 군생활은 그야말로 순돌이 아빠였다.
내 군생활의 절반을 보냈던 GP가 이젠 없어졌다. 어제 남과 북이 GP철수를 하고 폭파한 곳의 공동시찰을 진행했다는 뉴스를 봤다. 그 시절 힘들었지만 많은걸 느낄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을 잠시 돌아보게 됐다. 이제 동서로 연결된 비무장지대 내에 여기저기 길이 뚫리고 남과 북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이대로 우리의 안보는 지켜지는 것인지 걱정이 앞서는 게 사실이지만 백년 이백년을 마냥 이렇게 금을 그어 놓고 살 수는 없으니 우리 세대에서 통일이 될 수만 있다면 나 역시 그 일원으로 내 할 일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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