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병
- 채호기

저 꽃병은 자신이 흙이었던 때를
기억할까?
꽃은 산모퉁이에. 들판에
사라지는 목소리들로 사그라들고
꽃이 없는 빈 병이 아름답다.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은
꽃병의 자매였다는 것을
마침내 알아챘을까?
아무것도 꽂지 않았을 때
비로소 자기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죽은 다음에는 그 무엇도 없기에
눈에도 흙을 뿌리고
입에도 귀에도 흙을 채운다.


-『검은 사슴은 이렇게 말했을 거다』 / 채호기 시집 / 문학동네 / 2018년
죽음이 꽃병이 된다니 아름다우면서도 처연하다. 그렇다면 그 죽음에서는 무슨 꽃이 피는 걸까? 부처가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였지만 아무도 그 의미를 알아채지 못했을 때 오직 가섭만이 웃었다고 한다. 이 시가 부처와 가섭간의 웃음의 의미였을까? 그 꽃을 꽂는 곳이 우리 몸이라는 걸, 그래서 아무 말이 필요 없었던 줄도 모른다. 눈에서, 입에서, 온몸에 난 움푹 파인 구멍에서 꽃이 피어난다. 입을 열어도 꽃잎이고, 눈을 떠도 꽃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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