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전문가는 누구일까? 공무원? 교수? 시공자? 굳이 해외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 건축의 역사에서 건축사 Architect는 건축행위의 총괄자로 존중받아 왔다. 비록 우리나라에서 역사적으로 건축사 이름을 명기 하지 않았지만, 대목수라는 칭호로 건축행위에 있어서 중심이었다.
서구는 말할 것도 없다. 이집트 건물 유적에서 건축사 이름은 곳곳에서 나온다. 알쓸신잡에 나오는 피렌체 두오모 성당 옆에는 성당축성을 기념하는 동상들이 있는데, 금속공 출신의 건축사 조각이 수백년을 버티고 우뚝 서 있다. 유럽이나 북미를 여행하면서 놀랐던 것 중 하나가 거의 모든 공공건물에 건축사 이름이나 사진이 떡하니 차지하고 있었다.
이웃 일본도 마찬가지다. 이런 이야기를 협회 신문 사설에 주저리 주저리 푸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급격한 산업화로 지난 수십 년간 공공 건축 수요는 엄청났고, 어느 나라보다 많이 건축되었다. 지금도 크고 작은 공공 건축은 여전히 지어지고 있다. 이정도 지어 졌다면 유명한 공공건축이 몇 개는 지어질 법한데, 여전히 자랑할 건물이 없다. 혹자는 세종문화회관을 이야기 하지만 적당한 우수작이다. 예술의 전당은 고 김석철 건축사가 생전에 언급 했듯이 생뚱맞은 갓모양 형태가 당시 정치권력의 요구로 만들어졌다. 공공건축은 임기직 권력자의 건물도 아니고, 당장 몇 년 쓸 공무원의 건물도 아니다.
물론 건축사의 건물도 아니다. 하지만 건축사들은 건축에 대한 집요한 고민과 학습한 전문가들이다. 누군들 일본이나 유럽 등 서구의 공공건축에 비견되는 작품으로서 건축을 하고 싶지 않겠는가? 혹자는 작품이라는 표현을 비난하지만, 공공건축은 작품이 되어야 한다. 왜냐면 그것은 후세대의 유산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기능을 중시하지만, 당장 20년전 업무 체제와 시스템이 달라서 내부공간은 대대적으로 바뀌어져 있다. 이렇듯 현재 사용자의 불편은 수시로 바뀔 수 있다. 모든 사용자들은 당장의 불편을 이야기 하지만 이는 얼마든지 개선을 통해 가능하다. 그러나 건축은 다르다. 건축은 수시로 바뀔 수가 없다.
이런 태도는 조선시대보다 못한 태도다. 남아 있는 조선시대 공공건축을 보면 그때 그때 수선해서 누더기가 되지 않았다. 설령 부분적인 확장이 있더라도 전체 구성을 고려해서 반영돼 있다. 우리 조상보다 못한 누더기 공공건축을 수도 없이 본다. 이는 후세대에 대한 죄를 짓는 것이다. 세금으로 짓는 건축이라는 말도 조심해야 한다. 세금으로 짓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 하나를 문화재 가치를 담아 건축해야 한다. 작다고 대충? 안될 말이다. 그렇게 적당한 타협으로 지어버리니, 심한 경우는 10년도 안 되서 부수고 다시 공사한다. 결국 이런 행태는 세금 절약이 아니라 낭비다.
세종시 심사위원장이 중도 사퇴했다. 혹자는 기존 행정부 건축에 대한 내용을 중첩해서 이야기 하는데, 이는 얼마든 내부 공간 개선이나 업무 형식으로 개조할 수 있다. 더구나 이번 사태와 본질이 다른 이야기다. 세종시 청사 심사 위원장의 사퇴는 건축이라는 행위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이다. 전문가는 단지 거수기이며 들러리라는 시각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안에는 적절한 이권의 타협선이 존재한다. 단지 건물을 지으려는 공무원의 사고와 단지 수주일 뿐인 건축 설계사, 그리고 적당하게 합의해주는 전문가의 합류다. 이건 건축이 아니라 건물이다. 그런 건물은 심사할 필요도 없다. 다만 세금으로 짓는 단명해 재건축할 공공건축을 짓는 것은 죄악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이제는 양보다 질을 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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