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역특례 문제를
군대를 가지 않기 위한
제도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군에 더 많이 가게 하는
제도로 풀어냈으면


9월, 초록색이 순해졌다. 난생 처음 겪은 뜨거웠던 지난여름. 과연 가을은 올까 하고 의문이 들었는데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것이 이젠 살만하다.
그 뜨거웠던 여름만큼이나 논란이 되었던 2018년 아시안게임 출전선수의 병역특례. 논란의 시작은 선수 선발과정의 불공정과 병역 면제를 받기 위해 입영을 연기 했다는 특정 선수에 대한 비난이었다. 병역특례가 손흥민 선수로 인해 세계적인 관심거리가 되었는데 왠지 세계적인 조롱거리가 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병역특례에 대한 역사는 197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못 살았던 그 시절 어떻게든 대한민국을 알리자는 취지 아래 체육, 예술 분야에서 국위선양을 한 사람에게 사실상 병역을 면제해 주는 대체복무를 하게 하였다. 그 후 1990년에 개정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논란의 핵심은 병역특례가 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인 공정성과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구시대의 산물인 ‘국위선양’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이참에 병역특례를 폐지하자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어 국민의 공감도 얻지 못할뿐더러 ‘특혜’의 모양새가 강한 병역특례 제도는 대폭 손질을 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대두 되었다. 논란이 일자 정부는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여 제도 개선을 한다고 했다. 그러나 2014년 아시안게임 때도 논란이 있었으나 ‘찻잔 속의 태풍’격으로 유야무야 된 전례가 있어 두고 볼 일이다.
나 어릴 때 기억으로는 입영통지서를 받으면 동네 어른들을 찾아가 인사를 드렸고 어떤 어른은 용돈도 손에 쥐어 주었다. 입영을 하는 장병들은 그 지역의 시내에 집합하여 어두워지면 밤기차를 타고 훈련소로 향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5촌 당숙아저씨가 군에 입대하는 날 아저씨의 어머니인 넷째 할머니도 마을 사람들과 같이 집결지에 가셨다. 같이 간 일행 중 한 사람이 “애 기운 차리게 ‘박카스’나 하나 사다 주라”고 하니까 할머니께서 “군에 가는데 웬 ‘빠께스’를 가지고 가냐”고 해서 무거웠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웃음바다로 변했다 한다. 그 시절 군 입대는 마을의 큰 관심사였다.
나는 70년대 중반에 군에 갔다. 사실 나는 그 때 군에 안 갔으면 하는 마음과 등급을 낮게 받아 군에 못가면 어쩌나 하는 이율배반적인 두 마음 사이에서 갈등을 하였다. 논산 수용연대에 입소하면 신체검사를 또 하는데 불합격하여 귀향조치 되면 어쩌나 하는 쓸데없는 걱정까지 했다. 군번을 받고 논산훈련소 29연대에 배속 받은 날 기쁨과 두려움이 교차했다. 당시의 사회 분위기는 남자라면 으레껏 군에 가고 취직해서 결혼한 다음 자녀를 낳는 것이 당연시 되었고 거기에 일말의 의구심도 없었다. 그러나 오늘 날 병역특례니 양심적 병역 거부니 하여 신성한 국방의 의무가 훼손되는 것 같아 적이 마음이 불편하다.
군 복무는 국가안보가 최우선인 대한민국에 있어 가장 예민한 문제이다. 인구 감소로 인한 군 병력 자원이 감소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병역특례 문제를 군대를 가지 않기 위한 제도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군에 더 많이 가게 하는 제도로 풀어냈으면 하는 것이 젊은 시절 30여 개월간 국방의 의무를 다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바람이다. 문득 논산훈련소 시절 ‘군인의 길’을 외우지 못해 벌을 받아 안쓰러웠던 내 짝꿍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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