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
- 유희경

비가 내리고 있었다 급히 흘러가는 개천을 가로질러 다리가 하나 있었다 우산을 쓴 내가 그 다리를 건너가고 있었다 개천가에, 개천가에 긴 새가 서 있었다 걸음을 멈춘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쪽을 보았다 긴 새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불편했기 때문에 나는 왼쪽 어깨에 기대 놓았던 우산을 오른쪽 어깨로 옮기면서

저것은 새가 아닐지도 모른다 날개도 부리도 없는

그래도 비는 그치지 않는다 오른편에 둔 우산처럼 젖어가는 나는, 같은 생각만 반복하고 있다 그래서 아무도 떠올리지 않고 그러므로 아무도 그립지 않은 밤이다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비를 받아내고 있는 개천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서 나는 저것은 새가 아니기 때문에 생각에 잠겨 있고 난데없이 이건 또 어떤 지옥인가 싶었다


-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유희경 시집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시인은 풍경을 만드는 사람이고, 그래서 뛰어난 연출가여야 한다. 그 풍경이 단순히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글을 통해 마음의 작용으로 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마음에 어떤 지옥을 만드는 것은 그것이 종교적인 지옥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날카로운 흔적을 남겨서 그렇다. 어떤 흔적이든 그것이 우리 마음에 남아있다면 그것은 지옥이다. 이 시는 객관적인 시선이 전부를 지배한다. 오직 유일한 것은 짧은 의심이 주관적으로 서술되어 있을 뿐이다. 그 전환이 우리 마음에 환기된다면 그 또한 지옥일 것이다.
 

저작권자 © 대한건축사협회 건축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