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빠르지 않더라도
괜찮다.
다 괜찮다, 우리는.


온 천지가 꽃이다.
지난 2월 거제 지심도 동백을 보러갔다가 지난겨울 긴 추위로 동백이 제대로 피지를 않아 낭패를 보았다. 꽃송이 째 뚝뚝 떨어진 동백의 처연(悽然)한 아름다움을 놓친 아쉬움이 지워지지 않아 화엄사, 통도사의 홍매(紅梅)가 궁금했다. 그러나 그곳은 사람으로 붐빌 것 같아 전부터 마음에 둔 대구시 화원읍 남평문씨 본리세거지에 갔다.
마을에 들어서니 사람들이 적당히 있었고 이제 피기 시작한 홍매, 백매, 청매가 잘 어우러진 매화나무, 문익점의 후손 세거지 답게 마을 한쪽에 목화를 따지 않고 남겨둔 목화밭, 그리고 작은 규모의 한옥 마을이 가져다주는 정취가 참 좋았다. 홍매, 백매가 어우러진 작은 규모의 매화나무숲을 걸으니 매화향이 옷깃에 스미어 그야말로 서거정의 시 ‘문을 닫고 있다가(門掩)’의 한 구절-소매가득 맑은 향기 안고 천천히 돌아오네(滿袖淸香緩步歸)-을 생각나게 한다. 마을 뒷산을 조금 올라가 매화와 한옥이 어우러진 마을을 내려다보니 마음이 평안해져 오늘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번잡함이 싫어 사람 많이 모이는 곳을 피해 이곳에 왔지만 나도 혼잡한 군중 속의 한 사람이었고 번잡함에 일조했음에도 남 탓을 하고 있으니 민망하다.
얼마 전 TV 채널을 돌리다가 작은 운하를 따라 사람 걸음 속도에 맞춰 아무런 설명 없이 방송하는 것을 무심결에 보게 되었다. 나는 그 때 무슨 방송이 이런가하고 다소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조금 지나니 마음이 평온해지고 나 혼자 생각에 잠기며 10여분 이상을 보았던 기억이 있다. 속도가 만능인 요즘 ‘빠름’에 지친 사람들이 ‘느림’을 찾고 있다. ‘슬로우 푸드가’가 그렇고 ‘슬로우 시티’가 그렇다. 그리고 ‘슬로우 TV’가 있다.
슬로우 TV는 노르웨이 국영 방송인 NRK가 2009년 오슬로에서 베르겐까지 520Km를 기차 앞에 카메라를 설치하여 보여 지는 풍경을 특별한 설명 없이 7시간 14분간 방송한 것이 시작이다. 노르웨이 인구 500만 명 중 20%가 넘는 사람이 시청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한 노인은 기차가 마지막 역에 도착하자 역에서 내리려고 거실에 있는 가방을 찾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사람들은 자신이 마치 기차를 타고 있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한다. 그 후 NRK방송은 3,000Km에 달하는 노르웨이 해안 유람선여행을 134시간 생방송으로 진행하는가 하면 12시간 뜨개질을 방송하기도 했다.
요즘 방송을 보면 여럿이 나와서 잡담 비슷하게 떠드는 것을 수시로 목격하게 되어 방송공해가 아닌가싶던 차에 이런 슬로우 TV의 영상은 반갑다. 전혀 가공하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를 설명이나 편집 없이 보여줌으로써 각종 스트레스를 받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사색과 명상의 시간을 준다. 한 장면을 몇 분 동안 이어지는 롱테이크로 촬영한 영상을 그냥 바라보며 나 자신이 그 화면 속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빨리, 더 빨리’에 시달린 고단한 삶. 이 봄 온전한 나만의 시간을 가지며 고요한 순간을 맛보는 것도 좋겠다. 그렇게 빠르지 않더라도 괜찮다. 다 괜찮다, 우리는.
꽃이 진 자리에 아직도 잔향이 남아있다. 어떤 꽃은 지면서 봄의 절정을 알리고 또 어떤 꽃은 만개하여 봄의 절정을 완성한다. 절정에서 스러지고 절정에서 절정을 이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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