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많은 것이
벼슬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이지 사회의 소금이 되는
‘올바른 꼰대’는 필요하다


내가 사는 아파트 7층에 사시는 아저씨는 나와 남다른 인연이 있다. 전에 살던 아파트에서  같은 줄 아래위로 만났는데 이 아파트에서 다시 만나 또 같은 줄, 아래 위에 살게 되었다.  올해 94세인 그 분은 몇 년 전부터 부인이 요양병원에 입원하시는 바람에 지금은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아 혼자 사시고 있다.
아저씨가 거동이 불편해진 이후에는 좀처럼 만나지 못했는데 지난 일요일 그 분을 모시고 집 근처 음식점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음식점을 나오려는데 아들이 자기 슬리퍼가 없어졌다고 했다. 음식점 주인은 조금 전 어느 손님이 밖에 있는 화장실에 갔는데 아마 음식점 슬리퍼로 착각하고 신은 것 같으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한다. 나는 갑자기 화가 나서 아들에게 “또 슬리퍼를 신고 왔느냐?”고 한 소리했다.
내 머리 속에 슬리퍼는 ‘실내화’로 각인되어 있었기에 슬리퍼는 실내에서만 신어야 하고 또, 실내화는 돌발 상황에 대처하기에 부적합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평소에도 아들에게 슬리퍼를 신고 밖에 다니지 말라고 했지만 ‘소귀에 경 읽기’였다. 아내도 내 의견에 동조하지 않아서 아들의 행동은 자연스럽게 정당화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해 본다. 슬리퍼는 실내화라고 규정되어 내 머리에 입력되면서 실외에서 신으면 안 된다고 내 스스로 신념처럼 믿은 것은 아닌지 반문해 본다. 내가 어느새 ‘꼰대’가 되어 있는 것이다.
보편적 가치를 벗어나 자기 생각이 옳다고 굳게 믿고 행동하는 것처럼 무서운 것이 없다.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것이 바로 꼰대라고 한다. 자신이 스스로 꼰대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대화를 할 때 말을 독점하는 사람이 있다. 한참 말을 하고는 ‘무슨 말이냐 하면’을 접두어로 붙이면서 다시 부연 설명까지 하는 데는 입에 계량기를 달아놓고 ‘발언 종량제(?)’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충북건축사회나 협회 총회 때 이번만큼은 조용히 있어야지 몇 번을 다짐하고 회의에 참석하건만 누군가의 발언이 필요하다싶은 대목에 이르러도 조용하면 이대로 끝나는가 싶어 참지 못하고 발언을 하게 된다. 그리고 참지 못한 것을 곧 후회하면서 서운한 생각도 든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생각으로 가만히 있을까? 그러나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발언을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말을 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즉 내가 다른 사람들의 발언 기회를 빼앗은 것이다.
이런 나도 10년 전 정말로 꼰대 짓을 그만둔 일이 있다. 이곳의 대학에 건축과 관련된 두 과목을 출강 했었는데 어느 날 내 나이가 이 학생들의 부모 뻘이 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내 딴에는 열정적으로 가르친다고 했지만 나보다는 형이나 오빠 정도의 연배 사람에게 배우는 것이 그들에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자 미련 없이 그만두었다. 그런데 최근 감리 업무를 하면서 다른 사람의 설계 도면을 받고는 지적질(?)을 하여 꼰대노릇을 하니 참 얄궂다.
그렇다면 꼰대 없는 세상은 마냥 좋은 걸까? 나이 많은 것이 벼슬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이지 사회의 소금이 되는 ‘올바른 꼰대’는 필요하다. 꼰대가 되지 않으려고 할 말도 않고 젊잖게 있느니 나는 차라리 꼰대가 되겠다. 나는 오늘도 올바른 꼰대와 그렇지 않은 꼰대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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