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이언맨의 현실속 주인공인 앨런머스크는 2022년까지 화성에 유인우주선을 보내고 이번 세기안으로 100만 명이 거주할 수 있는 화성도시를 만들겠다고 홍보하고 있다. NASA는 화성거주를 위해 3D프린팅 기술이 접목된 우주환경 주거실험을 하고 있고 구글은 딥러닝을 통해 새로운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만들고 있다. 실현가능성은 두고 보면 알겠지만 우주와 미래를 향한 인류의 거대 담론을 이야기하는 앨런머스크와 NASA, 구글에게 경의를 표한다. 과연 이러한 거대담론에 건축을 하는 우리가 끼어들 자리가 있을까?
암흑과 같은 우주 속 현재 유일한 푸르른 행성인 지구. 그리고 그 속에서 진화를 이루어간 인류는 자연스레 아름다움에 대한 감정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푸르던 지구가 인류증가에 따라 점점 그 색을 잃어가고 더 이상 풍요로운 조건에서 시작할 수 없는 환경이 온다면 즉 화성, 심해와 같이 제한된 상황, 극한의 공간에서 형성되는 건축은 기존공간과 다를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인큐베이터 같은 생명유지 장치로 가득찬 작은 공간속에 살아가는 우주인에게 아름다움은 사치이며 건축인보다는 과학자,지질학자,기계공학자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 이런 의미에서 르꼬르뷔제가 주장한 ‘주택은 살기위한 기계(machine a habiter)’라는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능성만 충족하는 기계가 살기위한 공간을 의미하는 것 일까? 다른 한편으로 컴퓨터프로그램의 발전으로 특이한 형태의 비정형 건축물이 늘어나고 있다. 현실세계에서의 구축은 아직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지만 기능성을 제외한 채 마치 조각예술처럼 지어지는 건물은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까?
‘벽돌아 넌 무엇이 되고 싶니?~ 전 아치(Arch)가 되고 싶어요’라는 존재(Being)적 물음을 통해 기능적으로 안정되고 구조적 형태가 그 스스로 아름다운 아치가 되어 벽돌의 존재적 아름다움을 찾아주는 과정이 루이스 칸이 우리에게 던진 건축 본질의 화두가 아닐까 한다. 즉 존재자의 형상을 모사(模寫)하는 것이 아닌 존재자의 존재를 드러내어 세계와 연결해주는 것이다.
‘기계란 불필요한 부품이 없는 물체’라는 칼로스 윌리엄스 시인의 말처럼 아름다움의 핵심은 존재 그 자체를 드러낼 때 불필요한 어떠한 상징이나 메시지 없이도 그 스스로 완절 무결한 숭고한 본질적 아름다움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건축 본질의 의미 또한 내부기능의 조합이 형태로 드러나고 이러한 형태가 스스로 구조적 완결성을 가지게 되며 형태와 구조, 외관과 기능, 내부와 외부가 분리되지 않고 전체를 형상화하여 불필요한 것이 없는 일체화된 최적의 공간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앞서 르꼬르뷔제가 제시한 ‘machine’이라는 단어의 진정한 의미이지 않을까 한다. 이것이 우리가 미래와 인류를 위해 할 수 있는 작지만 거대한 건축의 담론이며 역할이 아닐까 생각한다.

p.s) 루이스 칸은 이렇게 말하며 화성에서 살아갈 듯하다. ‘레골리스(Regolith)야 넌 무엇이 되고 싶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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