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은 시간이 완성하는 예술이다.
‘20년 후’, 20년이란 대략 한 세대를 의미한다. 건축물이 한 세대를 넘기면 어떤 모습이 되어있을까?
설계자에게는 자신이 만들어낸 건축물이 지어진 본래의 모습으로 오랜 시간을 땅에 굳건히 남아 있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기쁨이며 영광일 것이다.
어떤 건축은 시간의 냉정하고도 엄격한 자정작용에도 풍화작용을 거치지 않고 살아남아있고, 어떤 건축은 지어질 당시의 화려함을 뒤로하고 쓸쓸히 사라지거나 경박하게 분칠되어 슬프게 거리에 앉아있기도 하다.
과연 좋은 건축은 무엇인가?
본지는 시간의 냉정하고도 엄격함 속에서 남아있는 건축물을 찾아보고 지금의 모습을 담아봄으로써 올바른 건축에 대한 물음에 답을 구하고자한다.

경복궁 앞 동십자각 너머 단아한 전벽돌 외벽의 <대한출판문화회관>이 있다. 반복되는 돌출창과 고전적인 아치의 묵직한 구성은 오래 된 궁궐의 담장을 마주하고 있는 건물의 장소성에 대한 건축가의 고민을 반영해주는 듯하다.

그 건축물은 건축사 홍순인이 설계하여 1975년에 준공된 건물이다.
35년 동안 사간동의 들머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이 건물은 홍순인이 김수근의 공간에서 독립하며 처음 지은 건물인데 문화의 거리 사간동이 겪고 있는 많은 변화 속에서도 유일하게 바위처럼 굳건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홍순인은 1943년 경북 안동 출생 홍익대 건축학과를 졸업했다. 오른손이 불편해서 입시에서 몇 번 좌절을 겪었던 그는 스케치가 중요한 건축을 하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한다. 당시 정인국, 강명구, 나상기, 김수근 등의 쟁쟁한 교수진으로부터 건축교육을 받았던 그는 특히 김수근의 왕성한 건축활동에 매료되면서 건축에 대한 깊은 열정을 품게 되었다. 1965년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설계사무소에 입사한다. 배기형, 이윤형,엄덕문의 사무소를 거쳐 김수근의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에 입사하여 홍릉 KIST APT, 세운상가, 남대문시장 종합설계 등의 작품에 참여하였고, 이후 공간연구소에 들어가 서울대 환경예술관, 서울대 본관, 건국대 등의 작품을 하면서 김수근이 건축대 학장으로 가게 되자 1973년부터 공간연구소를 대표하게 된다. 그러나 사무실의 방대한 조직운영에 어려움을 겪었고 독립에 대한 의지가 강해지면서 1974년 자신의 사무실인 ‘대우건축연구소’를 열게 된다.

<대한출판문화회관>은 홍순인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설계한 첫 작품이다. 이 일이 가능했던 것은 1972년 설계했던 연희동 주택의 건축주인 한림출판사 임인수 사장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한출판문화회관>은 공공건축의 성격을 가진 건물로 처음에는 공모하거나 유명한 건축가에게 맡기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당시 출판문화회관 상무로 건축을 담당하던 임사장이 자신의 주택을 성실히 설계해 주었던 홍순인을 추천했고, 반대했던 사람들도 홍순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적극 호응하게 되어 결국 설계자로 선정되었다.

홍순인은 다른 모든 일에 우선하여 최선을 다해 프로젝트에 임했다. 스케치부터 건축도면, 구조도까지 많은 도면을 직접 그렸다고 한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1975년 대한건축사협회상을 수상하게 되었고, 출판문회회관을 통해 그의 입지는 탄탄해졌다. 첫 작품이 성공하면서 많은 후원자들도 생겼다. 종로코아빌딩, 관철동빌딩, 충북대 마스터플랜(1981,1982 건축가협회상 수상) 등을 계획하게 되었다.

이 건물은 삼각형 대지에 지은 4층짜리 건물인데 정면은 까만 전벽돌에 박힌 독특한 창으로 구성된 3개층의 상부와 아케이드를 통해 가로와 만나는 1층으로 구성된 고전적 입면과 모던한 매스로 구성되어있다. 그리고 내부는 두 개의 매스가 만나는 부분에 코어를 배치했는데 그 코어공간의 분위기가 무척 우아하다. 이 건물은 여러 가지 양식적인 고민을 안고 작업을 했던 당시 한국의 건축사들의 고민을 아주 현명하게 풀어나간 작품을 평가된다.

홍순인은 일을 하면서 직원들에게 건축가의 정신과 자세를 가르치려고 노력하였다. 건축설계뿐만 아니라 구조, 견적, 설비, 감리 등 건축가로서 가져야 할 여러 가지 능력을 경험하게 해 주었고 현장에도 자주 나가게 했다. 특히 설계도면을 체크할 때는 “본인이 그린 도면은 본인이 세상에서 제일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본인이 긍지를 가질 수 있도록 최선의 최고의 도면을 그리도록 하자”고 주문하곤 했다.

이러한 열정적인 건축활동을 펼치던 중 1982년 40세의 젊은 나이에 많은 건축인들의 안타까움을 뒤로 하고 영면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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