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의 굴
- 정 영

구름이 지나가는 사이
수천의 얼이 태어났다
굴에 들었다 소멸한다

당신을 만나 손을 잡을 때 난 어떤가
거꾸로 매달려
두 눈을 껌벅이는 난 어떤가
저 막막한 대지에서
바람에 맞서는 난 어떤가
우주의 조롱 속에서
고개를 쳐드는 난 어떤가
침묵하는 난 어떤 얼굴일까

거울 속의 나는 안간힘으로
인간의 감정을 흉내 내려
입꼬리를 치켜든다
저것은 얼이 빠져나간 굴이다
산송장의 굴

사랑할 때의 나 당신만 알겠지
이별할 때의 나 당신만 알겠지

영원히 볼 수 없는
언제나 당신들만 보는
내 끔찍한 얼굴

-『화류』정영 / 문학과지성사 / 2014
이 시가 실린 『화류』라는 시집의 표4에는 “꽃과 버들이 노닌다”라는 짧은 시인의 말이 적혀 있다. 꽃과 버들이 노닐듯이 우리의 얼굴은 얼과 굴이 노니는가? 우리는 간혹 우리의 얼굴이 궁금하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정말 내 얼굴일까? 싶을 때, 우리는 하루 중에서 가장 깊은 상념에 빠질지도 모른다. 그럴 때야말로 얼과 굴이 같이 노니는 시간이 아닐까? 오랜 한자 문화권의 영향 탓에 우리말은 그 어원을 살피기가 힘들다. 얼+굴이라는 가정 아래 나의 얼굴은 어떨까? 끔찍할까? 당신만이 아는 내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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