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작품, 도시 랜드마크적 역할 형태로 계획

▲ 서산부인과(2009) ⓒ 손석원 기자

20세기 한국 현대건축의 두 거장, 김중업과 김수근의 업적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지만, 2009년 현재의 시간에서 그들이 남긴 건축작품으로 본 위상은 예전과 사뭇 다르다. 동십자각과 마주보고 서있던 김수근의 한국일보 건물은 미처 말릴 틈도 없이 어느 날 사라졌고 남산의 아이콘 중 하나였던 타워호텔도 새로운 모습으로 리모델링 중이다. 김중업의 작품은 또 어떤가. 제주대 본관도 사라진 지 한참 되었고 프랑스 대사관의 날아갈 듯한 지붕도 둔해진 지 오래다. 그리 많지 않은 근대의 유산들이 유달리 속도감이 빠른 자본의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스러져 간다.

김수근의 건축 이념은 그나마 공간이라는 조직을 통해 흔적을 이어가는 반면, 1952년부터 르 꼬르뷔제의 사무실에서 현대 건축을 직접 체험하고 돌아와 힘차게 풀어놓았던 김중업의 건축 이념은 그 자취가 점점 희미해져만 간다. 숫자는 많지 않으나 강렬한 조형적 언어와 특유의 카리스마로 당시 건축계를 압도했던 그의 건축을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동대문운동장 근처 대로변에 위치한 구 서산부인과 건물은 김중업의 1965년 작품이다. 삼각형 예각 형태의 좁은 땅이지만 도로에서 눈에 잘 띄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도시의 랜드마크적 역할을 할 수 있는 형태로 계획되었다고 한다.

서산부인과의 건축주인 서병목은 김중업의 부인과 친척 관계에 있는 유명한 산부인과 의사였다. 그는 병원과 주거를 겸한 건물을 원했고, 여기에 김중업은 자신의 조형 언어를 발휘한 건축물을 설계하게 된다. 그는 여기서 “건축이란 하나의 뚜렷한 사인이며, 인간의 감성에 던져지는 강한 몸짓으로 눈길을 끈다. 둥근 면에 뚫린 구명들이, 살짝 붙어 돌아가는 발코니들이, 삶에의 희열을 또는 태어나는 새 삶에의 찬가를 부른다”고 이야기하였다.

평면을 보자. 모서리가 없이 둥글둥글한 곡선들이 끊어질 듯 이어지며 때로는 복도의 폭은 층마다 공간마다 달라지고, 실들의 구성은 자의적인 듯하면서도 자연스럽다. 발코니와 대기실 등의 공간도 마치 태아가 자궁에 있는 모습을 연상하는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다분히 출산과 생명을 상징하는 산부인과의 성격을 상징하고자 한 의도로 보인다.

애초에는 1층에는 의사와 간호원실, 대기실과 실험실이 있었고, 2층에는 수술실과 5개의 병상, 3층은 주로 병상으로 계획되었으며, 4층에는 의사의 집이 있었다. 램프와 주요 실들로 구성된 메인 볼륨 외에 양측에 달린 발코니가 이 건물의 독창적인 형태를 더욱 강한 인상으로 다가오게 한다. 발코니 크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안할 정도로 얇은 두께로 버티고 선 좌측의 발코니는 마치 석회암 동굴의 종유석 같은 느낌으로, 가우디 건축의 영향임을 짐작케 한다. 특히 모형에서 보이는 옥상 부분의 굴뚝도 그러한데, 가우디로부터는 자유분방한 곡선을, 꼬르뷔제로부터는 공간을 연결해 주는 빛의 램프를 가져와 다시 ‘김중업스러운’ 건축으로 재창조했다 하겠다.

도로면의 외관은 대부분 당시의 기술로는 소화하기 어려웠을 곡선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외측의 유리로 마감된 전면 창이 있는 램프는 입면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성적 의미를 지닌 재치 있는 형태의 평면으로부터 출발했다. 원래의 모형을 보면 천창까지 이어지는 유리창이 인상적이었으나 예산 문제로 콘크리트로 마감되었다고 한다. 당초 노출콘크리트로 지어진 단일 용도의 건물이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낙후되는 외장을 개선하기 위해 몇 번의 칠이 더해졌다. 때로는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유치한 노란색이 칠해지기도 했고, 현재는 흰색으로 칠이 되어 있다.

개인의 소유물로 지어진 건축이 한 시대나, 한 도시의 경관을 만드는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은 현대건축의 필연적 과정이다. 대형 공공건축물도 부침을 거듭하는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서 이런 작은 건물이 본연의 제 모습을 유지하면서 관리되길 바라는 것은 억지스러운 일일 것이다. 다만 사라지지 않고, 그 시절의 이야기를 조금씩이나마 간직하면서, 그 길의 모퉁이에 오래도록 서 있길 바랄 뿐이다.

▲ 서산부인과 전경 <사진=김중업 건축론-시적 울림의 세계 정인하 1998>
▲ 서산부인과 발코니 <사진=김중업 건축론-시적 울림의 세계 정인하 1998>
▲ 서산부인과 모형 <사진=김중업 건축론-시적 울림의 세계 정인하 1998>
▲ 서산부인과 평면도 <사진=김중업 건축론-시적 울림의 세계 정인하 1998>
▲ 서산부인과 단면도 <사진=김중업 건축론-시적 울림의 세계 정인하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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