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전 바둑이 인생의 모든 것이었던 장그래가 프로입단에 실패한 후, 냉혹한 현실에 던져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 ‘미생’을 보며 공감하던 기억이 있다.
필자는 세종시에 건축사사무소를 개설한 미생건축사다. 결혼 후 남편 직장인 세종시에 내려오게 됐고, 지역 건축사사무소에서 근무하며 열정을 다했지만, 두 아이를 낳으며 요즘 말하는 소위 경력단절여성이 됐다. 다시 일을 하고 싶었지만, 아이를 키우며 야근과 철야가 반복되는 건축사사무소에 다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엄마라는 삶을 살다 건축사 시험공부를 시작하게 됐다. 누군가를 위한 삶을 살다 내 자신을 찾아가는 것 같아, 공부는 그 자체로 재미있었다. 주말에 학원가는 발걸음이 즐거웠고 배우는 것 자체가 좋았다. 그렇게 건축사가 됐다. 그러나 합격의 핑크빛 기쁨은 잠시잠깐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현실을 직면하게 된 것이다. 진짜가 시작된 거다. 실무경험은 너무 오래 전이었다. 그것도 당장 실무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장그래가 입사 후 단순한 복사기 작동도 서툴고 엑셀 프로그램도 못 다루던 것처럼 필자 역시 말만 건축사였지 아는 게 없었다. 합격동기들이 그러하듯 사무소를 개설했고, 다행히 그런 필자에게도 설계를 의뢰해주시는 고마운 분들이 있었다. 미생임에도 믿고 맡겨 주신 분들에게 열정을 다했고, 적은 수주금액의 일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했다. 그렇게 여러 개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이제 조금은 건축사 같은(?) 모습이 됐다. 여전히 완생이 돼가는 중에 있다.
아직 내 스스로 만족할 만한 건물을 설계하지는 못했다. 건축주를 설득하고 내 의견을 관철시킬 만큼의 역량이 부족한 것 같다.
일이 힘들게 느껴지고 지칠 때마다 건축사 자격시험 공부 자체가 재미있었을 때를 기억해본다. 설계가 다른 목적보다 그 자체로 보람되고 즐겁다면 결과물 역시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럴 수 있으려면 나 자신이 건축사로서 나만의 축척된 노하우와 건축주를 설득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완생 건축사가 되기 위해 오늘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미생 마지막회는 장그래가 바라던 정규직이 되는 것은 실패했지만 동료들과 벤처사무실을 개설하고 해외영업을 멋지게 해내는 내용으로 마무리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장그래의 독백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길이란 걷는 것이 아니라, 걸으면서 나아가기 위한 것이다.
나아가지 못하는 길은 길이 아니다.
길은 모두에게 열려 있지만 모두가 그 길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길이다.
그리고 혼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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