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살던 집
- 권대웅

길모퉁이를 돌아서려고 하는 순간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지려고 하는 순간
햇빛에 꽃잎이 열리려고 하는 순간
기억날 때가 있다

어딘가 두고 온 생이 있다는 것
하늘 언덕에 쪼그리고 앉아
당신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어떡하지 그만 깜빡 잊고
여기서 이렇게 올망졸망
나팔꽃 씨앗 같은 아이들 낳아버렸는데
갈 수 없는 당신 집 불쑥 생각날 때가 있다

햇빛에 눈부셔 자꾸만 눈물이 날 때
갑자기 뒤돌아보고 싶어질 때
노을이 붕붕 울어댈 때
순간, 불현듯, 화들짝,
지금 이 생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기억과 공간의 갈피가 접혔다 펴지는 순간
그 속에 살던 썰물 같은 당신의 숨소리가
나를 끌어당기는 순간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
권대웅 시집 / 문학동네 / 2017
폴란드에서 한 여성이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갑자기 죽음을 맞이할 때 멀리 프랑스에 사는 한 여성은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비탄에 잠긴다.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은 이처럼 두개의 삶이 사실은 하나를 이루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다. 이 시에서도 시인은 문득 그런 또 다른 생을 느낀다. 그런데, 그 생은 또 다른 내가 사는 생이 아니라 “갈 수 없는 당신 집”이다.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는 당신이 곧 나의 다른 생이고, 그것은 내가 당신과 연결 될 때, 여기 있는 나도 겨우 존재 할 수 있다는 자각의 순간 일 것이다.
<함성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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