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라!
- 서정학

빨리, 써라! 제발 아껴서 써라! 땅을 파도 안 나오는, 이건 정말 못 해먹겠네, 적당히 시간은 없고, 줄― 줄― 써 내려가야 한다. 새 문서, 새 웹페이지, 새 전자메일 메시지, 줄― 줄― 잡음이 낮게 깔리고 있었어. 새로 써라! 문서 선택, 기존 문서에서 새로 만들기, 서식 파일에서 새로 만들기. 순서에 맞게 한 가지만 써라! 문화시민이니까 줄― 줄― 한 줄로 써라! 줄― 줄― 썩둑, 새 나가는 머리카락들, 무조건 써라! 명쾌한 이 키보드를 써라! 줄― 줄― 이 상표를 써라! 꼭, 그걸 써라! 다른 걸 쓸 수 없다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 제발, 신경 좀 써라! 네 엉덩이에 그 느낌을 써라! 웅장한 돌비 써라!운드의 글자를 맛본다. 웬만하면 어려운 발음, 줄― 줄― 흐르는 침. 혀 끝에 남는 이 둥글둥글하고 씁쓸한 느낌, 써라!

 

-『동네에서 제일 싼 프랑스』서정학 시집 / 문학과지성사 / 2017
인간은 눈, 코, 혀, 귀, 몸을 통해 외부의 자극을 받아 들인다. 그 중에서도 눈과 귀는 대상에 대한 정보를 소화하는 기관이고, 코와 혀, 몸의 감각은 자극을 소화하는 기관이다. 그런데 이 기관들은 참으로 표현하기 어렵다. 어떻게 아프냐는 의사의 질문에 속시원히 답한 기억이 있는지 생각해 보라. 맛이 어떻냐는 질문에 정확히 표현해 본 기억이 있는지. 어떤 냄새냐는 질문도 마찬가지다. ‘써라’는 글을 적으라는 명령이기도 하지만 맛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다. 글을 쓰는 행위를 말로 표현하면 참 쓴 맛이라서 일까? 공감각적 환위가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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