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씨집 벤의 기도
- 심보선

능숙하게 잔인을 구사했던 로마인들
토가의 주름을 펴던 노예의 손목을 낚아채
그 위에 새겨진 주저흔을 바라보며
능청스럽게 말했네

“이 약해빠진 암염소들아,
호메로스조차 너희들의 인생을 시로 쓴다면 삼류로 전락할 것이다!”

복수의 운명이여,
나를 언제 종착지에 데려다 놓겠느냐

죽은 자의 얼굴을 산 자의 눈에 비춰주던
제국의 황금 조상(彫像)을 조각조각 찢어발긴
그 녹슨 칼날을 부디 내게서 거둬다오

아아, 슬픔이 거대한 아마포처럼
세상을 덮어가네
깨진 기왓장을 다시 붙이듯
죄와 덕을 하나로 합칠 수만 있다면

나의 부모들은 모두 바다에서 죽었네
나의 아이들은 모두 바다에서 죽었네

나는 이제 더 이상 바다에 침을 뱉을 수 없네
그러니 땅에 두 배 더 많은 침을 뱉을 수밖에

복수의 운명이여,
나를 언제 육지에 데려다 놓겠느냐

오래전 지붕에서 떨어졌던 기왓장은
아직도 땅에 닿지 않았는데*

* 영화 「벤허」에서 벤허의 연인인 에스더가 그의 끈질긴 복수심을 두고 한 말이다.

 

-『오늘은 잘 모르겠어』심보선 시집
   문학과지성사 / 2017
죄와 덕을 하나로 합칠 수 있다면 세상의 모든 복수는 저절로 종결되는 것일까? 모르겠다. 복수가 종결 됨으로써 세상은 평화로와 지고, 우리는 아무데서나 거리낌 없이 침을 뱉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 복수는 오래전 지붕에서 떨어진 기왓장이 땅에 닿음으로써 깨지고 종결된다면 그것을 다시 잇는 행위는 무엇일까? 모르겠다. 지금 나는 바다에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나는 표류 중일까? 항해 중일까? 모르겠다. 오늘은 잘 모르겠다. <함성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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