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어머니께서 갑자기 고향으로 내려가 삶의 마지막 부분을 정리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의 건강, 외숙모·외삼촌의 죽음, 서울생활의 외로움 등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어머니가 건강하게 잘 이겨내시리라 생각했었다. 현상설계 마지막 주 새벽2시쯤 퇴근해 집으로 가니 어머니께서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고 계셨다. 그리고 2개월 후 나와 어머니는 울산행 비행기에 탑승하고 말았다. 귀향, 그것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나는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얻기 위해 귀향을 결심했을까? 실상 서울에서의 삶이란 잘 꾸며진 가상현실 속에서 정교하게 작동되는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았다. 건축 작업 또한 그 가상세계의 작은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았다. 마치 고고한 철학적 가치를 추구하는 양 거창한 개념을 앞세우고 매끈하게 포장된 디자인도 실상 건축주의 구매욕을 자극하기 위한 눈요기에 불과했다. 납품이 끝나면 잊혀질 촬영장의 오픈세트와 같은 무대였다. 귀향은 어머니로부터 시작되었고, 어머니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고 요구하지 않아도 챙겨주는 진솔함, 이성이 아니라 감성으로 공감할 수 있는 건축, 그것은 어머니와 같은 건축이었다.
귀향은 뜻밖의 변화를 만들어 내었다. 어머니를 중심으로 가족이 모이고, 갑자기 낙향한 제자를 타는 목마름으로 기다려주시는 선생님들도 계시고, 소리없이 도와주는 선·후배·친구 건축인들도 있다. 이 감사함은 고향에서 약 20년간의 공백과 낯설음을 즐겁게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된다. 촛불집회를 포함한 사회적인 변화를 오피스텔 테라스에서 학교운동장을 바라보며 ‘서시’의 마지막 문장을 반복하고 있는 나 자신도 발견하고, 그동안 갇혀 있던 내 몸이 말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도 한다. 합천 호연정에서는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를 생각했다. 프랑스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고흐의 상상력과 사고를 느끼려고 노력했으나 호연정에서는 고흐의 그림 속에 있는 듯하다. 생활 속의 건축과 각 나라의 문화, 역사, 철학을 담고 있는 건축을 얘기하며 뮤지컬의 본고장에서 스탠딩으로 봤던 뮤지컬의 감흥과 종합예술로서의 가치가 건축과 상통한다는 얘기도 하며 반나절이 훌쩍 지난지도 모른 채 주제는 계속 흐른다.
아직 이곳에선 권위와 위선으로 가득 찬 이들을 만나지 못했다. 평론가들이 자기들끼리 어떤 것들의 가치를 결정짓는 모임도 만나지 못했다. 지금 이곳에선 어머니처럼 가족처럼 생활 속 건축의 공공성과 집사용 설명서 그리고 건축에서 사후관리의 필요성을 얘기한다. 나는 그 속에서 사회를 디자인하기 위해 희망으로 빛나는 내일을 건축을 통해 설계하고 싶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이 시간과 이 공간은 어머니, 선생님, 선후배친구들을 포함한 사회공동체 가족이 주는 또 하나의 선물이 아닐까? 어머니의 생애가 나에게 전달되듯 건축 또한 그러하리라 생각되어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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