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크기를 규정하는 요인 중 하나는 권력이 도시주민을 통제하는 신호체계에 있다고 한다.
목소리로 알릴 수 있는 마을 단위에서, 종소리와 북소리 같은 물리적인 소리 신호가 닿아 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도시민의 영역으로 한정하기도 한다. 이러한 도시는 생활의 기본조건인 의·식·주가 해결 돼야 한다. 물론, 권력을 가진 도시민들은 물자를 조달 하는데 크게 곤란을 겪지 않는다. 하지만 찌꺼기인 오물의 처리 한계는 도시의 소화력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즉 자연적으로 썩거나 환원되는 토지의 크기가 적정인구와 비례해야 하기 때문이다.
중세도시의 오물은 먹고 싸고, 입고 버리고, 생활을 위해 사용되는 에너지 부산물이 있다. 이는 통상 분뇨와 재가 주종을 이룬다. 처리는 자연으로 환원시키기 위해 인근 논경지로 내보내거나 물에 흘려보내야 한다. 도시의 한정된 토지에서 최대한 동원되는 수단으로서는 텃밭에 투기 하거나, 가축에 위임 똥돼지, 똥개를 기르며 처리와 재생산을 유익하게 바꾸기도 하였으며, 도심에 형성된 하수도에 버려 인근 개천에 흘려보내는 방법이 있다. 이는 세계 중세 도시에서 흔하게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문제는 장마철에는 순식간에 오물을 치워 주지만, 건기나 겨울철에는 하수도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더구나 인구 증가로 인해 한정적 토지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는 가축의 수는 도시민의 환경을 극도로 위해하게 만들었다. 결국 인위적 노동력을 동원해 미처 처리하지 못한 오물과 재는 도성 밖 근접지 하천에 버려져야 했다. 썩지 않는 재와 오물이 쌓여 하천의 바닥이 인접지보다 높아질 수밖에...
지금 서울인 한성부에는 1650년대 이후 50년간 57회의 물난리가 기록돼 있다. 홍수로 인해 개천가의 집이 무너지고 사람이 쓸려가는 사고가 빈번했다. 백성을 사랑한 영조대왕은 개천의 범람을 사고 원인으로 판단해 대대적인 청계천 준설사업을 벌인다. 도시의 소화불량과 재난을 방지하는 위대한 치적으로 역사에 기록된다. 청계천에서 준설된 토사를 오간수문(조선시대 청계천에 있던 다섯칸짜리 수문)양쪽에 쌓아 산을 이루었고, 이산을 조산(造山) 또는 가산(假山)이라 불렀다. 오늘날 방산동의 옛 이름이 조산동 이다. 도성 밖 거지들은 주로 다리 밑에서 기거 하였으나, 조산이 생긴 후 땅굴을 파서 기거하니 거주환경이 좋아지므로 인해 거지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땅거지라 불렸으며, 이들을 방치 할 경우 심각한 치안문제가 우려되어, 궁성에서 일어나는 온갖 잡일과 궂은일을 비밀리에 처리하는 업무를 맡기면서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해 주었다. 생계 보장책으로 뱀을 잡아 팔수 있는 독점권한을 줌으로 인해, 정부에서 인정한 독점 판매권을 갖는 땅거지를 땅꾼이라 한다.
땅거지의 출현으로 수적으로나 금전적으로 다리 밑 거지들을 압도 하였고, 일년에 한차례 각처의 거지들이 모여 거지패의 총 두목(꼭지딴)을 뽑는 행사를 가졌는데, 그 행사가 조산에서 열렸다. 조산의 거지두목이 서울 장안의 거지 전체를 통솔 하게 됐다. 꼭지딴은 그 위세가 당당하여, 거지들의 잔칫날에는 장안의 명기(名技)들도 마음대로 부를 수 있었다고 한다. 거지의 집단은 온 장안의 기생집 소문을 가지고 홍보대사 역할을 톡톡히 할 수가 있었으며, 평판이 좋지 못하면 장사를 할 수가 없었다. 특히나 궁에서 흘러나오는 정보는 궁 밖 양반들에게는 훌륭한 정보로 활용이 되어, 직업적인 해결사로서 활약이 대단하였다. 18세기 이후 거지들은 당당한 서울 주민이 되었고, 정조대왕 이후부터는 풍년거지라는 말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내용들은 전우용교수가 지은 돌베개 출판사의 ‘서울은 깊다’라는 책에 소개된 것이다. 서울의 시 공간에 대한 인문학적인 역사가 서술되어 아주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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