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뉴 숲의 용의자들
- 리산

지난밤 나는 그 숲에 있었다

매꽃 하얗게 헝클어진 덤불에
반쯤 파먹힌 눈알이 뒹굴고
부리에 피를 묻힌 검은 까마귀가
먼 강을 향해 날았다

매꽃 이파리 관을 쓴 어여쁜 나는
두 팔을 하늘로 치켜들고
당나귀가 눈먼 아침을 몰고 올 때까지
맨발로 춤을 추었다

먼 곳에서 침묵하던 흰 수염의 귀뚜라미
바람도 없이 나부끼던 측백나무 이파리들

지난밤 내내 나는 그 숲에 있었다


-『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리산 / 문학동네 / 2013
그 곳이 블로뉴 숲이건 서울 숲이건 아랑곳 없이 시인은 그 숲에 있었다. 거기서 뭔가 끔찍한 일이 벌어졌지만 그 사건은 전말이 없다. 앞서 끔찍하다고 얘기했지만 사실 거기엔 돌아 설 수 없는 유혹이 있다. 이 시는 이 유혹에서 시작된다. 결코 사건이나 이해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어느 숲이건 간에 그 숲은 시인이 느끼는 유혹이라는 이름의 다른 지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유혹이라는 장소를 시인은 숲이라고 명명한지도 모른다. 그 숲에서 받은 치명적인 아름다움. 이 시는 그 가해의 이야기다.

<함성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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