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나보다 더 나은 오늘의 나, 과거가 아닌 지금의 내 모습이 저 들녘의 벼이삭처럼
세상을 환하게 한다면 나는 익어가는 것이 아닐까?


하늘이 파랗다.

영원히 지속 될 것만 같았던 지난 여름의 무더위. 언제 그랬냐는 듯 며칠사이에 아침, 저녁 선선한 기운을 몸이 먼저 알아차린다. 태풍이 물러간 오늘은 파란 하늘에 떠다니는 흰 구름이 한가롭다. 하늘을 향해 화살처럼 꼿꼿하던 벼가 고개 숙여 곱게 익어가는 가을이다. 가을은 흔히 결실의 계절, 수확의 계절이라고 하여 풍요로움을 상징하기도하지만 단풍의 화려함 뒤에 낙엽의 쓸쓸한 정서도 함께 지니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사색의 계절로 지나온 삶을 다시 한 번 반추(反芻) 하게 한다.
어린 시절,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도 그랬고 중·고등학교 다닐 때도 그랬다. 나 보다 작게는 10년, 많게는 몇 십 년을 더 살아온 인생의 선배들은 한 결같이 말했다. “너희들 때가 가장 좋을 때다”라고. 그 때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다. 온통 하지 마라는 것 투성이에다가 오로지 공부, 공부, 공부만이 전부였던 그 시절 나는 어서 빨리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되었으면 했다.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하고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먹으며 그 누구, 그 어느 것에도 속박되지 않은 자유 그 자체인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어른들은 그 좋은 ‘어른’이라는 직함을 떼어버리고 도로 어린아이가 되고 싶다니! 어린이도 나름 고민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어른들이 그것을 잊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정작 나이가 들고 보니 어른노릇 하기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자유보다는 책임이 따랐다. 그렇더라도 나는 다시 그 때로 돌아가기는 싫다. 아니 어쩌면 돌아가기가 겁난다는 것이 맞겠다. 꿈 많고 나름 재미도 있었던 지난 시절이었지만 필름을 다시 돌려 내 마음에 드는 ‘내 모습’으로 바꿀 자신이 없다.
얼마 전 ‘이 소설의 끝을 다시 써 보려 해’라는 한동근의 노래를 우연히 들었다. 가사 내용은 이렇다. 만남은 운명적이었는데 결말이 너무나 아파 시계를 다시 돌려 이별의 슬픈 페이지를 지우고 사랑의 마지막 장면을 다시 쓰고 싶다는 것이다. 과거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회한이 절절이 묻어나는 노래인데 살다보면 그런 아쉬움이 어디 사랑뿐이겠는가.
다소 아쉬움이 있을지라도 과거를 기웃거리지는 않겠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얻을 수 있듯이 과거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오늘의 온전한 ‘나’를 만날 수 있다. 나이가 들어 옛날을 아쉬워하기 보다는 어제의 나보다 더 나은 오늘의 나, 과거가 아닌 지금의 내모습이 저 들녘의 벼이삭처럼 세상을 환하게 한다면 나는 익어가는 것이 아닐까?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동경(憧憬), 가보았던 길에 대한 회한·아쉬움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세상은 돌아간다.

가을이 좋다.
이 가을, 지금에 감사하며 마음에 드는 내 모습을 그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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