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고도 좋은 것……’, 이른바 ‘착한 가격’이란 게 정말 있을까? 그렇게 정색을 하고 질문을 하면 다들 머뭇거리게 될 테지만, 우리는 보통 ‘착한 가격’의 존재에 대해서는 별로 의문을 품고
있지 않는 것 같다.
사실 질 좋은 상품을 값싸게 구입하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소비자의 희망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는 어쩌면 신기루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는 값싸고 질 좋은 상품을 찾아서 이 가게 저 가게를 기웃거리다가, 이제는 인터넷까지 뒤적거리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유통과정에서 가치가 부풀려졌다면, 당연히 그 거품을 걷어내고 사고파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그렇지만 무턱대고 “싸다”는 점에만 방점을 찍다보면, 되레 비지떡을 먹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굳이 멀리 갈 것도 없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주거 공간……,건축을 한번 들여다보자. 정말 “싸고 좋은” 집인가?
건축물을 산업제품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다소 민망한 일이겠지만, 굳이 상품으로 분류한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의 건축물은 ‘완제품’이 아니라, 일종의 ‘주문생산품’으로 거래되는 특징이 있다. 물론 설계도면을 보고 그대로 공사 를 진행해나갈 수만 있다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만은 아니다. 게다가 건축과정을 지켜보면 정말 다양한 변수들이 잠복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어디 그뿐이랴? 건축주의 변심(變心)도 파도처럼 출렁거린다. 부득이 설계변경이 이루어지고, 당초 계약사항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게 현장이고, 그만큼 역동적인 것이 바로 우리건축이기도 하다. 그래서 애당초부터 ‘설계변경’이라는 절차가 마치 완행열차 선로내의 간이역처럼 줄지어 늘어서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예로부터 더 무변광대한 ‘집’이라고 일컬어지는 우주(宇宙) 자체의 존재원리가 바로 또 ‘변화’라고도 하지 않던가? 그렇지만 그 변화에 대한 대응은 제각각이다. 설계내용이 바뀌고 변경을 한다고 하면, 건축주는 눈부터 부라린다. 그러다가 서로 옥신각신하게 되고, 그게 때로는 감정의 앙금으로 침전되었다가, 결국 사용승인(준공)을 신청할 무렵이 되면 계약당시에는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이른바 제2막 제3장이 펼쳐지기도 한다.
물론 모두 다 서로의 과욕(過慾)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당초 출발점에서부터 잉태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건축주는 주문생산품이라는 건축의 특성을 도외시 한 채, 여기저기에서 견적서를 차례로 받았을 테고, 또 시공자는 그걸 유효적절하게(?) 활용하곤 했을 것이다. 비록 한자리에 마주 앉아서 같은 공사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손은 굳게 맞잡았지만, 이미 서로 다른 밑그림을 그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건축주가 가장 저렴한 비용에 가장 좋은 집이 완성되기를 꿈꾸고 있었다면, 시공자는 또 나름대로 그 계약금액에서 이것저것을 모두 다 공제하고 나서, 실행 공사계획을 짰을 것이다.
한때 ‘최저가(最低價) 입찰‘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그때는 마치 거꾸로 경매를 하듯, 가장 낮은 가격을 제시한 업체를 골라 일을 맡겼다. 급기야 단돈 ‘1원 짜리’ 공사계약까지 등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니, 1원짜리라니…….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한 발상인가? 단돈 1원에 공사를 맡겨달라고 하는 사람도 어처구니 없었지만, 그걸 1원에 시행하라고 하는 사람도 문제였다. 대체 서로 무슨 배짱이었을까? 어쨌든 그게 이른바 ‘착한 가격’의 효시였던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착한 것이 아니라, 우리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창출한 ‘불순물’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그 ‘착한 가격’은 좀체 우리 곁을 뜰 줄 모르고, 날이 갈수록 더 굳건하게 똬리를 틀어대고 있다. 급기야 지금 우리사회에서는 ‘착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이미지까지 고착해나가고 있는 실정이다.
자연스레 다들 ‘바보’가 되기를 권하는 사회! 지금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건축사(建築士)로 입신한지 어언 사반세기가 지난 이제 와서야 그걸 깨달았으니, 이를 어쩌랴? 오호, 통재
(痛哉)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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