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나무보다 잘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나무를 옮길 수 있다는 것 뿐
우리 인간이 함부로 할 대상은 아닌 것 같다

라일락 향기 그윽한 4월이다.
산수유, 백목련이 서둘러 봄을 알리더니 어느새 벚꽃마저 가뭇없이 졌다. 낮은 구릉의 경사진 밭에는 하얀 배꽃, 연분홍 복숭아꽃이 한창이고 산에는 연록 빛깔의 새 잎이 황홀하다. 겨우내 죽은 듯이 있다가 때가 되면 일시에 꽃을 피우고 새 잎을 밀어 올리는 나무를 보면 신기하다. 나무는 저절로 자라기도 하지만 사람이 심어서 키우기도 한다. 그래서 1946년 미 군정시절 정해 놓은 것이 4월 5일 식목일이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식목일 날짜가 논란이 되고 있다. 나무는 싹이 나기 전에 심어야 하는데 요즘 지구 온난화 현상으로 4월 초에 새싹이 나기 때문에 3월 초나 중순으로 식목일을 앞당겨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식목일 이전에 나무를 심는 일이 많아 졌다. 식목일을 옮기자는 주장에 반대하는 쪽은 역사적인 배경과 70년간 유지되어 온 것을 바꾸는데 드는 행정력과 홍보비용의 낭비를 이유로 들었다. 역사적인 배경이란 다름 아닌 신라가 삼국통일한 날이자 1343년 조선시대 성종이 선농단에서 직접 밭을 일군 날이 4월 5일 이라는 것이다. 양쪽의 주장에 일리는 있으나 나무에 관한 것은 나무의 입장에서 생각 할 문제이지 인간의 입장에서 생각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10여 년 전 TV 드라마 「다모(茶母)」가 인기리에 방영 되었었다. 우리에게 “아프냐. 나도 아프다.” 황보윤의 명대사로 더 알려진 「다모」는 신분사회가 엄격했던 조선시대 관료인 황보윤(이서진 분)과 천민신분인 다모 채옥(하지원 분)의 슬픈 사랑 이야기이다.
그 당시 나는 채옥의 명대사가 더 가슴에 와 닿았다. “관비가 어찌 사람에게 견줄 수 있겠습니까. 관비는 나무 신세와 다를 바 없지요. 한 번 자리를 정하면 누가 옮겨 주기 전에는 절대로 움직일 수 없는.. 제가 가고 싶고 또 머무르고 싶은 자리가 있어도 그 자리에서 말라죽기 전에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채옥의 신세를 나무의 속성에 비유한 작가의 솜씨와 하지원의 명연기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채옥의 절규에 가까운 그 대사를 접하는 순간 나는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나무의 속성을 무시한 채 사람의 편리한 명분에 의해 현 식목일을 유지시키는 것은 재고해 볼 문제이다. 사람의 편리에 의해 자행된 일이 어디 이것 뿐일까? 애완동물인 개를 의인화하여 옷을 입히고 머리에 리본을 단 개는 보기에도 민망하고, 최근 멸종위기종인 수리부엉이 사진을 찍기 위해 둥지 주변의 나무를 잘라 내고 카메라를 들이 댄 폭거는 부끄럽기 그지없다.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 자연은 본래 인자하지 않다지만 사람 또한 자연에 몰인정하다. 수많은 발길에 드러난 산책로의 나무뿌리를 피해 걸으며 문득 생각한다. 인간이 나무보다 잘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나무를 옮길 수 있다는 것 뿐 우리 인간이 함부로 할 대상은 아닌 것 같다. 지구의 주인이 딱히 인간이 아닐진대 자연 앞에서 인간이 좀 더 겸손 했으면 좋겠다.
이 봄, 지는 것이 어디 벚꽃뿐이랴. 간 것은 오고, 온 것은 또 그렇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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