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냉철해야겠지만
국민은 감정이 있다.
국민감정은 이성적이기 보다는
원초적 본능을 따른다.

혼자 먼 거리를 갈 때는 주로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대중교통의 이점은 한 순간에 지나칠 수도 있는 소중한 풍경들을 눈길로 보듬어 온전한 내 것이 되게 한다. 지하철을 오르내리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사람 사는 모습도 볼 수 있어 좋고, 버스 안에서 잠시 사색에 잠기는 것 또한 하나의 즐거움이다. 누가 코를 골거나 큰 소리로 전화를 오래 하지 않는다면. 그러나 오늘은 그 기대가 쉽게 깨졌다. 통로 건너편 옆자리에서 노트북 컴퓨터를 하던 젊은 남자가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목소리도 큰데다가 일본말의 억양은 귀에 더 거슬렸다. 자세히 살펴보니 일본 사람이 분명했다. 일본 사람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더 나빴다. 편안한 마음으로 가기는 이미 글렀고 어떻게 말을 할까 망설이고 있던 중에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나는 눈에 힘을 주고 근엄하게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세워 입에 갖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러자 그는 움찔하여 죄송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내 전화를 끝냈다.
시끄러운 전화 소리가 싱겁게 해결되자 차 안은 이내 평온을 되찾았고 무료해진 나는 스마트 폰에서 중계하는 축구를 잠깐 보았다. 골이 들어가자 관중석은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였다. 문득 사람들은 무엇에 열광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지하고도 사랑이 담긴 열정(熱情)과 달리 열광은 어쩌면 이성적(理性的)인 것이 배제된 행동인지도 모른다.
작년 11월 「WBSC 프리미어 12」 세계야구대회가 있었다. 이 대회는 일본이 주도적으로 준비했는데 일본의 속셈은 이번에 우승하여 2020년 자국에서 열리는 올림픽에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는 계기를 마련하는데 있었다. 우승하려는 욕심이 앞선 일본은 대회일정도 멋대로 바꾸는 등 참가국들에게 혼란을 줘 비난을 받기도 했다. 도쿄돔에서 한국과 일본의 준결승전. 한국이 8회까지 0:3으로 뒤진 가운데 9회 초 마지막 공격의 선두 타자는 오재원. 오재원이 누구인가? 두산베어스 소속으로 상대팀을 자극하는 행동을 자주하여 두산 팬을 제외한 나머지 9개 구단으로부터 안티 팬이 가장 많은 이른바 ‘국민밉상’이다.
오재원은 타석에 천천히 걸어 나오더니 타석을 벗어나 크게 스윙을 하거나 홈플레이트를 발로 꾹꾹 밟는 등 일본투수의 신경을 계속 거슬리게 하더니 마침내 좌측 안타를 만들어 침체된 공격의 물고를 텄다. 이런 의도적인 얄미운 행동은 우리 팀에게는 오히려 분위기를 상승 시켜 기적 같은 4:3의 역전승을 가져와 국민을 열광케 했다.
일본전 이후 오재원은 열사의 반열에 올라 ‘오 열사(烈士)’라는 별명까지 얻었으니 국민의 감정은 참으로 묘하다. 우리 국민 60% 이상이 양국의 국민감정이 점점 악화되는 것을 걱정하고 있다지만 수백 년 이상 내려온 역사 속 일본의 악행을 우리들 피 속에 흐르는 유전자는 기억을 한다. 상대팀일 때는 얄밉기까지한 그가 국가대표로 나와 일본을 자극할 때는 뭔가 통쾌한 느낌의 카타르시스를 불러오는 이유는 뭘까? 일본은 이겨야 한다는 생각. 그것이 바로 ‘국민감정’이다. 국가는 냉철해야겠지만 국민은 감정이 있다. 국민감정은 이성적이기 보다는 원초적 본능을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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