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라져 버린 것들은
온기가 있고,
그것들은 가슴 한 구석에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올 해의 막달 12월 첫째 주 토요일. 매월 첫째 주 토요일은 내가 어머니를 뵈러 가는 날이다. 자식들 5형제 중 어느 하나도 어머니를 모시지 못했기에 자식들이 순번을 정해서 주말마다 어머니가 계시는 충주 고향집에 다녀온다. 10여 년 전 혼자 되신 후 거동이 불편해진 몇 년 전부터 어머니는 요양보호사와 함께 계신다. 집에 도착하면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집 안팎을 둘러본다. 시골집이라 대지가 3백 평이 넘어서 대문 앞은 바깥마당이다. 지금은 고작 주차장 구실 밖에는 못하지만 옛날 바깥마당은 안방과 더불어 다목적 공간이었다. 농사일을 마무리하는 어른들의 공간인 동시에 동네 친구들과 모여 각종 놀이를 하는 어린아이들의 공간이기도 했다.

대문을 들어와 본채를 돌아서 뒤란으로 가면 야트막한 산을 등지고 돌로 쌓은 축대 위 비탈면에 매실, 모과, 대추, 감나무가 있고 장독대 옆 빈터 별채에는 솥을 걸어 놓고 메주를 쑤거나 두부를 만들고 기름 적을 붙였다. 오랜만에, 잘 열리지도 않는 나무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아궁이는 시커먼 입을 벌린채 열려있고 반들반들 윤이 나던 솥뚜껑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윤택을 잃었다.
한 때는 빛이 났을 각종 그릇이며 생활도구들은 이제 먼지에 쌓여 벽에 걸려있거나 부뚜막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다. 그래도 일상의 삶이 녹아 있는 옛 물건들이 반갑다. 그 중에서 화로 위에 올려 놓았던 쇠로 만든 ‘삼발이’가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정작 화로는 보이지 않는다. 당시는 쇠로 만든 화로도 있었지만 흙을 구워서 만든 질화로가 많았다. 아궁이에서 불씨들을 부삽으로 긁어 화로에 담아 방 안에 놓으면 그 쓰임새는 실로 다양했다.
단열의 개념도 없었던 60년대, 추운 겨울 화로는 방을 따뜻하게 덥혀주는 난방 기구요 음식을 조리하는 취사 도구였다. 어쩌다 손님이 오면 화로를 먼저 내주었다. 또 수건이 귀해서 수건 하나로 몇 사람이 쓰다 보면 어느새 수건이 젖는데 이것을 말려 쓰는데도 화로는 요긴하게 쓰였다. 뛰어 다니다가 화로를 발로 차거나 화로에 얹어 놓은 주전자를 쏟는 날이면 방안은 온통 재티가 날아서 난장판이 되었다. 화로에 꽂아 놓은 인두는 옷의 솔기나 모서리의 구김살을 펴는 바느질 용구였지만 어머니 몰래 흰 가래떡을 달구어진 인두에 눌러 대패 밥처럼 얇게 밀려 나오는 떡을 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렇게 쓰임새가 많았던 화로도 생활이 향상되면서 석유곤로로 바뀌었고 이제는 석유곤로마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모든 사라져 버린 것들은 온기가 있고, 그것들은 가슴 한 구석에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화로가 그렇고 공중전화가, 우체통이 그랬다. 허나 그것들이 다시 돌아온다 해도 그 때의 그 느낌은 아니리라. 어머니의 발걸음 소리가 어딘가에 숨어 있을법한 쓸쓸한 장독대에 초겨울 햇살이 내려오고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아련한 추억에 잠겨 나는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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