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 마지막 수요일은 ‘문화가 있는 날’
바쁘고 힘들어도 이날만은 문화에 흠뻑 빠져보자
보다 나은 작품과 내일을 위하여

 

재작년 봄 미국에서 온 친구부부와 남도 여행을 한 후 이 핑계 저 핑계로 아내와 나들이 한 번 못한 것이 미안해, 10월에는 단풍구경 한번하리라 다짐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어영부영하다 보니 목적지도 단풍 따라 남하하다 종적을 잃어버렸다. 11월 25일, 이제는 더이상 미룰 수 없기에 단풍은 포기하고 부여의 백제문화재현단지와 마곡사를 둘러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일기예보대로 아침부터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린다. 비 오는 날 장거리 운전은 위험하다는 아내의 말에 또 다시 주저앉을 수 없어 고민하던 차, 며칠 전 스크랩해 둔 신문의 “이우치 한국기와 컬렉션” 전시기사가 떠올랐다. 오후 되어 잦아든 가랑비를 이고서 부암동 유금와당박물관으로 향했다.
1910년대부터 평생토록 한국의 기와를 모아 온 일본인 이우치 이사오 선생은 ‘한국 것은 한국으로 가야한다’는 소신으로 수천 점의 희귀한 와당을 되돌려주었고, 이를 기반으로 유금기와전문박물관이 세워졌다.
우리부부뿐인 전시실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조는 물론 중국의 와당까지 한눈에 볼 수 있었다. 특히 막새기와가 많았는데 같은 소재를 가지고도 삼국의 표현기법은 달랐다. 이 중 인상 깊은
것은 고구려의 ‘연꽃. 사람 얼굴 수막새기와’였다. 아래쪽이 약간 파손된 속칭 ‘신라의 미소’로 불리는 막새기와의 얼굴만큼 큰 것은 아니나 부릅뜬 눈과 굵은 수염이 만주벌판을 호령하던 고구려인의 웅혼한 기상을 그대로 보는 것 같다.
큐레이터에게 건축사 명함과 집필하는 책을 설명하니 ‘한국기와, 지붕 위의 아름다움’이란 책자를 준다. 관람을 마치고 바로 이웃한 대원군 별장인 석파정을 둘러보았다. 왕의 아버지인데도 집은 부연도 달지 않고 담장 또한 사고석이 아닌 막돌을 석회로 쌓았다. 뒤란의 화계는 바위를 그대로 둔채 최소한으로 다듬어 놓아 주변 풍광과 함께 고졸한 맛이 우러나고, 가지를 낮게 뻗은 노송이 연륜과 품격을 더한다. 아내에게 전문지식으로 설명하니 주변 관람객도 귀를 쫑긋한다.
서울에서 건축을 생업으로 하면서도 이제야 이곳을 찾다니, 건축사란 직업이 그리 빡빡한 것인지 아니면 내가 게으른 것인지 몰라도 회한이 서린다. 오늘은 문화체육관광부 제정 ‘문화가있는 날’인 매월 마지막 수요일이라 박물관은 무료, 석파정은 반값이었다. ‘경로우대’가 있어 별 득은 없지만 앞으로 매월 마지막 수요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문화를 즐기기로 하였다. 밥값을 벌었다고 흐뭇해하는 아내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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