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푸른 신호등에 마음 놓고 달릴 수
있는 것은 상대방이 빨간 신호등에
정지 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리라.

  추석 연휴 끝 날, 가까운 서해안으로 드라이브 나갔다. 두 시간을 달려 점심 무렵 어느 포구에 도착하여 수산시장을 찾으니 경매가 끝난 시장은 한산한 가운데 꽃게, 갈치, 병어, 백조기가 경매가가 쓰인 종이 한 장씩을 입에 물고 상자에 담겨 있었다. 병어가 어떨까 하여 눈여겨보니 물색(物色)이 좋지 않아 포기하고 밖으로 나와 전어가 있는 수족관으로 갔다. 전어는 1㎏에 2만 5천원, 상차림 비용으로는 1인당 5천원이란다. 1㎏을 저울에 달아 달라고 하니 안에 들어가 있으라 한다. 그래도 보는데서 1㎏을 달라고 하니 몸이 퉁퉁한 주인여자는 ‘사람을 못 믿으세요?’ 한다. 내심 불쾌했지만 기분 전환 차 나온 것이라 그냥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다섯 마리는 구이로 하고 나머지는 회 무침으로 달라고 했더니 주문 표에 구이 1/2, 회 무침 1/2이라고 적는 게 아닌가! 1/2이 아니고 다섯 마리라고 다시 일러주니 이렇게 적더라도 알아서 잘 해 줄 테니 염려 말라고 한다. 이윽고 구이가 먼저 나왔는데 여섯 마리가 나왔다.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1마리는 서비스입니다.’ (서비스? 1㎏ 중 한 마리 일 텐데 웬 서비스?) 잠시 후 회 무침이 작은 접시에 나왔다. 채소와 함께 무친 전어회는 보물찾기 하듯이 휘저어야 겨우 하나를 찾을 수 있을 정도였다. 전어를 kg으로 몇 번 먹어 본 경험이 있는 터라 그 양을 대충 알 수 있다. 그런데 오늘은 1㎏의 반도 안 된다. 다른 자리의 사람들은 어떤 심정으로 먹고 있을 지 궁금했다. 뭘 더 주문해서 먹고 싶었지만 참고 나왔다. ‘사람을 못 믿으세요?’ 여자의 말이 귓가에 맴돌며 배신감이 엄습해 온다.

  미생지신(尾生之信)이라는 고사(古事)가 있다.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인 미생은 사랑하는 여자와 다리 아래에서 만나기로 하여 기다리고 있었는데, 여자는 오지 않고 갑자기 내린 소나기로 물이 불어 다리 밑까지 물이 불어났으나 그는 여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교각을 붙들고 기다리다 결국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후세 사람들은 이러한 미생을 융통성이 없는 고지식한 사람으로 비웃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도 버린 신의 있는 사람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미생을 사람마다 각기 자기 입맛대로 평가 하겠지만 바보 같은 죽음 보다는 인간 세상에 필요한 덕목인 신의(信義)에 초점을 맞춰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푸른 신호등에 마음 놓고 달릴 수 있는 것은 상대방이 빨간 신호등에 정지 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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