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름보다는 느림을 담는 길,

시간을 내어놓고 쉼을

말할 수 있는 공간들이

우리 주위에 생겨나길...

지난 여름 나는 세 개의 길을 걸을 기회가 있었다. 첫 번째 길은 뜨거운 태양이 한참이던 지난 5월 이화동 골목길이었다. 그 오래된 골목골목을 걸으며 시간을 덧쓰고 놓여있는 수많은 건물들 사이사이를 누비는 것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먼 나라에 와있는 듯 하여 이국적이기까지 하였고 그 느낌 또한 매우 좋았다.

하지만 기대하고 간 이화동을 이름나게 한 벽화들은 나를 실망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물론 서울 한 구석 평범한 마을을 예술가들이 주민들에게 소소한 행복을 주기 위해 힘을 모아 촘촘히 채워나가 여러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된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하지만 벽화들 덕에 관광객들이 그 가파른 길을 벽화를 향해 돌진 하듯이 달려 줄을 서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는 것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한 거리에 새로운 속도를 부여하여 새로운 낯설음으로 나에게는 다가왔던 것이다. 시간이 멈춰진 골목골목을 그것도 경사가 상당한 그 길을 벽화를 향해 돌진하듯 걷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텐데 그들은 그 앞에서 포즈를 취하기 바빴고 지쳐 쓰러지기 일쑤였다.

이화동의 멋은 새로 덧칠해진 벽화가 그 시간과 공간 사이사이에 자리 잡아 소리 없는 그리움을 불러일으킬 때, 그 덧 씌워진 시간이 우리에게 말을 걸 때가 아닌가 싶다. 그런 측면에서 벽화마을의 명소는 벽화가 있는 골목길이 아닌, 그 수많은 이야기와 시간이 덧 씌워진 벽화 없는 골목과 그 담장의 속삭임과, 그 건축물 속의 사람들일 것이다.

두 번째는 지난 8월 말 시간을 내어 방문한 일본 나오시마섬의 이에프로젝트로 유명한 마을 길이다. 일본의 버려지다시피 한 섬마을의 기존 가옥을 여러 가지 전시시설 등으로 마을 전체에 골고루 배치하여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세계적인 유명 작가들의 작품과 안도 다다오 뮤지엄까지... 그 골목을 걸어 그 장소들을 찾아가는 것은 즐거운 기억임이 분명하다. 물론 지중 미술관으로 유명한 다다오의 작품이 섬 전체에 위치하고 있는 것도 사람들을 이끄는 힘이다.

이화동과 다른 점이라면 한 가지 요소가 아닌 여러 아이템을 갖고 있어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느낌의 여러 공간을 제공한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벽화 하나가 아닌 사람을 모으고 공간을 느끼게 하는 여러 요소가 다른 점인 것이다.

하지만 이곳도 박제된 새처럼 놓여 진 가옥들 사이를 목적지를 향해 걷는다는 측면에서는 다르지 않았다. 다음 목적지를 향해 한곳에 오래 머물 수 없고 그러다 보니 나만이 아닌 모든 사람이 지도를 들고 다음 목적지를 향해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세 번째는 나오시마를 방문한 길에 하루 중 반나절의 시간을 내어 방문한 나오시마 인근의 테시마 뮤지엄을 향한 길이다. 테시마 뮤지엄은 나이토 레이의 작품을 전시하는 뮤지엄으로 건축사 류에 니시자와의 작품이다.

예술가의 작품을 근원적으로 연구하여 건축과 예술이 하나가 된 듯한 공간이었다. 이 공간으로 가는 길은 항구에서는 자전거를 이용해야 하고 가까이에 다가가서는 한참을 돌아 후면으로 진입하게 되어 있다.

전면의 건물을 보고 일부러 뒤로 돌아 가는 것은 왠지 낯선 느낌이었지만, 천천히 걸으며 마음을 정화하는 듯한 자연을 지나 또 하나의 자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정말 좋은 경험이었다.

예술이 태어나는 최초의 공간, 그곳은 언어를 넘어선 근원적인 장소이다. 인간의 정신은 이곳이 뭔가 다르다고 느낀다. 돌에서도 땅에서도 나무에서도 뭔가를 찾으려 한다.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예술이라는 사실을 의식하는 순간 더 이상 예술이 아니게 되는지도 모른다"라는 나이토 레이의 말처럼 돌고 돌아 천천히 걷다보니 내가 근원적 장소의 한 가운데 서있음을 문득 느끼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뮤지엄 안은 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항구에서 뮤지엄까지 약 4Km를 달려와 전시장 안으로 들어 선 사람들은 내외부 구분이 없는 뮤지엄의 구조와 그 안의 작은 물방울 소리, 외부의 자연의 소리와 흘러가는 구름을 보고 느끼며 고요함에 빠져들게 된다. 이런 것이야말로 진정한 공간의 느낌이 아닐까?

이 공간에선 시간을 잊게 되고 자연과 동화 되어 그저 쉼을 얻게 된다. 켜켜이 쌓인 시간은 없지만 머무는 사람들에게 자기 삶의 무게와 시간을 내어 놓게 만드는 공간...그런 길...그게 테시마 뮤지엄이 아닐까 싶다.

앞에 언급한 이화동 벽화마을길, 이에프로젝트 마을길, 테시마뮤지엄 가는 길은 물론 각각의 특징과 다른 배경이 있는 길들이다. 단순 비교는 어렵겠지만 이제 우리도 빠름 보다는 느림을 담는 길, 시간을 내어놓고 쉼을 말할 수 있는 많은 공간들이 우리 주위에 생겨나기 바란다.

조용함의 감동은 멈추어진 시간을 덧쓴 건축물을 무겁게 거닐기보다 그 안에 머무는 사람들이 자기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시간을 내어놓을 때 배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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