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땅은 사적으로 공간이 점유되고, 공적인 불확정적 공간을 만들기 위해 끊임 없이 바뀌고 있다. 사적 공간의 접근불가와 공적 공간의 투명함에 의해 도시민은 어쩔 수 없는 무기력에 빠져있기도 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도시의 통계적인 분포의 개념, 식물적인 진화의 개념 등 다양한 접근이 시도되었으나, 그 사이에 우리의 도시는 서서히 균질화되는 현실에 직면하였다. 이런 현상을 극복하는 실험으로 기존의 도시에서 폴리를 설치하여 기존도시 조직에서 새로운 공적인 장치를 만들기도 하였으나, 예를 들어 광주에서의 폴리 I 과 폴리 II 의 사업은 건축사들에게는 흥미로운 시도였으나, 시민의 반응 측면에서는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축사들의 노력은 도시의 곳곳에서 폴리와 파빌리온을 만들고자 한다. 폴리는 기능 없는 구조물이라는 뜻이고, 파빌리온은 가건물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용어로 현대건축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떻게 파빌리온은 도시에서 자림매김할까? 파빌리온은 도시를 더 낯설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익명적인 도시를 더 따뜻하게 만드나? 그 무엇보다도 도시는 진화하기 때문에, 여전히 도시에 식물의 종과 진화의 개념을 적용하여 해석하는 것은 유효하다. 보통의 건물이 땅에 뿌리를 내린 나무와 같다면, 가건물같은 파빌리온은 뿌리를 내리지 못한 착생식물이다. 이끼와 같은 착생식물은 땅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공기나 돌에 뿌리가 노출되어 양분을 얻으며 생명을 유지한다. 이끼는 자연스런 땅과 나무의 군집의 형국에 자연스러우며 때로는 신비한 분위기를 만든다. 생태환경을 자연스럽게 작동하게 한다.

메가스트럭처와 도시의 익명적인 건물이 즐비한 곳에서 무색무취의 도시의 공간이 만들어졌다면 그곳에 만들어진 현대의 파빌리온은 마치 그곳에서 오래 자란 나무와 같이 한 장소의 성격을 착생한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동안 한국 전쟁이후의 복구와 개발의 광풍에서 파빌리온과 가건물은 정치적인 슬로건과 부동산 개발의 전시행정으로 이용되어 왔다. 정권탄생의 축하, 엑스포에서의 국격의 표방, 개발의 전시 등등 파빌리온은 선전의 도구였다. 그러나 현대 에 들어 광주민주화항쟁 이후 잊혀지는 도시의 의미를 다시 살리는 폴리로 이용되었으며, 현재는 신축의 공간이 부족한 도심에서 새로운 도시분위기를 만드는 장치로 이용되어 젊은 건축사들이 실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되곤 한다. 이전 세대들이 재건과 개발 그리고 부의 축척코드로 만든 부유하는 듯한 도시의 결핍을 채울 수 있는 작지만 의미 있는 장치, 파빌리온은 도시를 살린다.

파빌리온에서 건축사들은 사람이 사는 건물에서 쉽게 하지 못하는 건축적 실험을 진행한다. 선례로 엑스포에서 미스의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에서 근대건축의 공간에 대한 포석을 보여준 것처럼 엑스포 건축의 파빌리온들은 각 나라의 기술과 건축적 개념을 내세워 왔다. 1차대전 이전의 러시아 건축도 파빌리온과 선전탑에서 기술적인 진보와 정치적인 의미까지 선전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박람회 시작이후 그러나 2차 대전이나 오일쇼크 때까지 엑스포 건축이외에 파빌리온은 크게 의미를 가지기 못하다가, 건축개념적 관점에서 시작한 버나드 츄미의 라빌레트 파크의 폴리이후 건축의 실험과 미학적 향유의 대상으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2000년부터 런던의 여름을 달구고 있는 서펜타인 파빌리온도 다른 나라 건축사의 작품을 런던시민에게 보여준다는 목적이 있으며 매해 세계건축 스타의 건축적 실험도 흥미를 더한다. 그 자체로 설치건축적 작품으로 특별한 전시물 없이 하이드파크에 방문한 대중의 관심을 끌고 있다. 해마다 세계 거장들의 건축적 성과를 선보이기는 하나 운영위원회에서 결정하는 커미션의 방식은 15년 동안 실험적인 세계 거장들의 작품을 선보였다. 그러나 올해 스페인 건축사 셀가스카노(Selgascano)의 작품은 의외로 스페인 건축사에서는 첫 번째 작품이나 그동안 명맥 있게 유지되었던 텍토닉의 진보는 이루지 못하며 가설적인 모습만 보였다. 또한 재료에 있어서는 반짝이는 합성수지를 이용하였지만 구조와의 접합에 있어서 특별한 디테일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셀로판 띠로 된 부분은 매일매일 투명테이프로 보수에 바쁠 지경이다. 그동안 서펜타인 갤러리에서는 실험성이 강한 작은 파빌리온으로 건축적 진보를 보여왔기에 올해는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최근에 이탈리아의 막시 뮤지움에서 진행된 건축과 음식의 전시는 의식주에서 식과 주가 같이 시작한 역사와 미래에 대해 상상적인 아이디어도 접목해서 보여준다. 어렸을 적 바닥이 낮은 아궁이에서 가마솥의 밥을 짓던 모습, 아프리카의 형형색색 토기의 모습, 일본의 다도공간, 네덜란드에 새로 생긴 마켓홀 등등 건축적 세팅과 음식문화가 어우러진 모습을 보이며 음식과 건축의 관계에 대해 밝힌다. 또 건축을 가능하게 하는 생물적, 사회적 요인을 재조명한다. 미치코를 위한 티하우스(Teahouse for Michiko)는 작은 공간이 가변적으로 변하며 일본의 다도를 다양한 공간적 위상으로 즐기는 것을 표현하고, 아틀리에 바우와우는 흰 리무진(White Limousine Yatai, 2003)이란 작품으로 거리를 돌아다니며 아무데나 주차하여 식사를 하는 공간으로 바꾸는 것을 볼 수 있다. 리무진은 전시장에까지 들어와 가설건축의 의미를 더하고 있다.

서펜타인 파빌리온이 텍토닉적인 실험에 그치며 새로운 행위적 의미를 찾지 못한 반면에, 건축과 음식이라는 주제 아래 다양한 나라의 세팅에 대한 탐구는 새로운 파빌리온의 가능성을 만들었다. 파빌리온 역시 인간의 행위를 동반하지 않는 텍토닉적 탐닉은 개념적인 한계를 지닌다. 파빌리온이 도시를 착생하기 위해선 그 사회와 지역에 결핍된 무언가를 보상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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