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한해의 마무리가 진행되는 시기가 왔다.
2014년의 대한민국은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처럼 온갖 사건 사고가 쏟아지고 우리는 그 한 가운데 있다.
대한민국은 세월호 참사로 슬픔과 분노의 파도 속에 키를 놓쳐버린 배처럼 휘청거리고 있다. 꽃다운 나이의 학생들은 어른들의 “가만 있으라”는 말만 믿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떠나 버렸다. 그러나 더더욱 슬프고 무서운 것은 세월호의 참극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만도 아니라는 것이다. 대구지하철 참사 때도 ‘자리를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는 방송을 듣고 기다리다가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6.25전쟁 때 이승만은 ‘대통령이 서울에 있으니 안심하라’ 하고서 다음날 서울을 버리고 한강철교를 폭파했다. 거슬러 올라가면 임진왜란 때 선조는 비가 오는 캄캄한 밤 백성을 뒤로 한 채 몰래 도성을 버리고 압록강 앞 의주까지 달아났다. 여차하면 중국으로 뛸 심산이었다. 왕이 자신을 지켜주고 자신과 운명을 같이 할 것이라고 믿었던 백성들은 왜군의 칼끝에 원귀가 되고 말았다. 배를 버린 선장, 다리를 폭파한 대통령, 백성을 버린 임금-그 시대 리더의 행동방식과 생각의 중요성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역사는 반복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2014년의 우리 건축계도 예외는 아니다.
2월에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 체육관 붕괴사건을 시작으로 5월에 아산 오피스텔이 붕괴사건, 그리고 10월 17일 판교 테크노밸리 환풍기 추락사고까지… 크고 작은 사건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우리 건축사들은 이 사건의 주범 또는 공범으로 때로는 동조자나 방조자로 취급받고 비난받는다.
건축사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자.
스스로 잠시 잊고 있었지만, 건축사가 하는 모든 행위는 법의 범위 안에 있고 ‘공공성’과 ‘사회성’을 담보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국가로부터 건축사자격증을 받는 순간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준엄한 명령이며 사명이며 의무인 것이다. 건축사는 주기적으로 큰 사건 사고를 경험한다. 그리고 그 원인을 가지고 싸우다가 근본적인 원인규명이나 해결책 마련에 실패한 채 그렇게 다음 대형 사건사고의 불씨를 남겨두고 또다시 살아간다. 역사도 반복되고 사고도 반복된다.
1920년대 미국여행보험사 관리자인 허버트 하인리히는 7만 5천여 건의 산업재해를 분석해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1건의 치명적인 사건사고나 실패 뒤에는 29건의 같은 원인으로 발생한 작은 사건사고나 실패가 있었고 300건의 관련된 이상 징후가 있었다. 여기서 나온 1:29:300을 그의 이름을 따서 ‘하인리히 법칙’이라고 한다. 이 법칙이 시사하는 바는 첫째, 어떤 큰일이든 그전에 작은 징후들이 계속 우리를 위협하고 있었고 둘째, 즉 작은 징후라도 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이를 개선하지 않으면 큰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사소한 사고가 그에 그치지 않고 연쇄반응을 일으켜 큰 사고를 야기하게 되므로 사소한 사고가 났을때 이를지나치지 말고 즉각적으로 대응하고 신속히 해결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2014년의 일련의사건 사고들이 하인리히법칙의 시작점인지 아니면 종착점인지의 판단은 오로지 이에 대한 우리의 시각과 자세에 달려있을 것이다.
웬만한 부도덕은 일상으로 여기고 너그러운 관용을 이해하는 한, 어느 정도의 편법과 요령을 능력으로 인정하고 그렇지 못함을 무능력으로 생각하는 한, 그리고 아무리 시끄럽고 큰일도 ‘시간이 다 해결해 준다’라는 신념에 변화가 없는 한, 올해의 사건 사고가 하인리히법칙의 종착점이 될 수는 없음을 확신한다.
한스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 에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망토가 등장한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는 것이 우리에게만 안 보이는 것으로 믿으며, 가엾은 우리들은 벌거벗은 채로 지금 거리를 활보하거 있는 것은 아닌가?
자 이제 ‘사회’라는 거울에 우리의 모습을 비추어보고 ‘도덕’이라는 잣대로 다시 한번 재어보자. 이제 밖으로부터 안을 들여다보자. 그리고 거기서부터 다시시작하자.
남을 이기려는 자는 반드시 먼저 자신부터 이겨야 하고 남을 논하려는 자는 반드시 자신부터 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