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플 신사옥

돔은 여전히 우리에게 생소하지만, 돔과 원형의 건물은 현대건축에서 제법 재등장한다. 곡선은 돔과 원형에서 타원형, 비정형까지 이르지만 요즘은 시각적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 변천은 모방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공공의 인간사를 구체화하는 과정이었다. 인간사가 굴곡이듯이, 인간사를 촉발하는 곡선을 필요로 한 것이다.

▲ 불레의 돔

유럽교회 돔의 원형은 공교롭게도 무덤을 모방한 것이다. ‘Tomb’의 어원은 그리스의 ‘Tymbos’(몸이 묻히는 곳)에서 비롯된다. ‘Tymbos’는 시체가 타서 재가 되어 생기는 둔덕과 같은 모양이다. 둔덕은 평평한 땅에서 죽음을 기리는 공간으로, 인생사 굴곡의 종지부가 둔덕이 된 것이다.

기원 전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의 텐트(페르시아 왕의 텐트천정 그림에 감명 받음)와 아킬레스(평소 존경하던 신화적 존재)의 무덤을 보고 그의 무덤을 알렉산드리아에 봉분처럼 만들었다 한다. 똑같은 이유로 로마의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존경하던 알렉산더의 무덤을 보고 로마에 그의 무덤 영묘(mausoleum)를 만들었다.

영묘는 알렉산더의 무덤과는 달리 지름이 90m되는 원형건물이며, 고대 로마의 중심인 캄포 마르찌오(Campus Martius)에 위치하여 자신이 세상의 중심임을 알렸다. 아우구스투스를 비롯하여 그와 관계있는 많은 저명한 사람들이 묻혀 있다. 아우구스투스의 사후 그의 친구이자 부하였던 아그립파는 아우구스투스를 기리기 위하여 영묘의 남쪽에 지금의 판테온의 건설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불에 탔고 현재는 하드리안 황제가 지은 판테온이 존재한다.

영묘는 돔과 같은 천정의 형태가 아니었으나 판테온은 봉분 형태의 직경 42m의 돔으로서, 사실 너무 빠른 시기(2-3세기)에 지어진 돔이다. 프로렌스의 두오모의 돔이 브루넬레스키에 의해 14세기에 지어진 것을 보면 이탈리아 문화권에서 돔의 재현에만 천년 이상 걸린 셈이다.

판테온은 영묘를 발전시켜 돔 형태로 지어진 것이지만 그 기능은 무덤보다는 로마제국의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신전이었다. 봉분 안 둥근 천정 아래에서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신들의 지붕으로 변모된 것이다. 죽음과 신앙이 교차하는 인간사의 곡선이다. 죽은 자를 기리는 것과 신앙의 대상을 만드는 것이 동일한 인간만의 특권인 것을 확인시켜주는 곳이다.

근대에 와서 돔의 의미는 미국에서 의회의 지붕으로 쓰이면서 민주와 화합이 되었지만, 전체주의에서는 선동정치의 도구로도 단골손님이었다. 히틀러는 그의 건축사 알버트 슈피어(Albert Speer)에게 엄청난 돔 공간의 계획을 시켰으며 러시아, 체코, 북한에서도 돔을 응용한 건물을 종종 볼 수 있다. 르 코르뷔지에는 인도 샹디가르 의사당의 지붕으로 비대칭적인 원형천정을 만들면서 돔을 현대화하였다. 반면 우리의 국회의사당은 초기의 평지붕 계획안에 정치인들이 우리도 돔을 씌우자고 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그것도 의사당 천정이 아니고 입구 쪽에 말이다. 의미보다는 기억하기 쉬운 형태만 차용한 것이다. 억지 인간사를 만드는 몸부림이다.

▲ 베를린 국회의사당

현대건축에서 원형의 평면은 표준화에 영향을 받는 사무실 등에는 적용되지 않았으나, 최근의 친환경 경향에서는 원형의 평면을 마천루에서도 종종 사용한다. 이유는 태양광을 골고루 받는 최적화된 에너지상태를 만들기 때문이다. 또한 건물의 꼭대기는 돔으로 씌워져서 유리커튼월의 연속면을 이루게 된다. 이런 마천루와 더불어 민주와 합의라는 의미에 맞게 돔을 적용한 건물들도 있다. 노먼 포스터가 설계한 베를린의 국회의사당 유리돔이 대표적이다. 의회당 상부의 돔은 유리로 만들어졌고, 사람들이 올라가서 의회당을 내려다볼 수도 있다. 권위적인 모습의 돔이 민주적인 기능을 하게 된 것이다. 유리돔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구도에서 민주적 전환을 표현한다.

원형과 돔의 종교적, 권력적 상징은 지구, 화합, 협업을 상징하며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언어로 바뀌었다. 런던아이의 동그란 모습, 애플 신사옥의 협업을 장려하는 도너츠 평면 등 세계 각지에서 더 높은 가치의 효율적인 원의 세계를 지향한다. 가질 수 없는 것을 이제는 누구나 가지게 된 것인가? 최적화를 위해 진화인가? 당분간 원과 돔의 “곡선 신드롬”은 지속될 듯하다. 오히려 무덤과 납골당이 효율적으로 각이 지게 되고, 사람 사는 곳과 공공공간은 동그래진다.

▲ 런던 시청

곡선 신드롬의 대표격인 비정형건축의 가능성은 여기에 있다. 권력적 상징의 돔과 원형에서 벗어나 민주적인 비대칭적 모습을 띈다. 그러나 부담스러운 방종의 형태에 자본의 코드까지 더해져 눈살을 찌푸리게도 된다. 공공공간을 만들며 사람들이 모이는 세팅을 형성하는 비정형의 곡선은 적절하다. 사람들이 마주하는 방향성을 형성해주고 에워싸 주기 때문이다. 곡선은 열린 공공공간을 형성한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에겐 익숙지 않다. 원형의 상징은 강강술래 같은 무형문화에만 있고, 건축유형문화에는 원구단 이외에는 없는 듯하다.

과연 원과 곡선을 어떻게 응용하여 푸근한 곳을 만들 수 있을까? 흔히들 전통건축의 자연스럽게 휘어진 대들보와 기둥들은 여유를 보여준다 한다. 또한 자연스런 땅의 흐름에 맞춘 우리의 정원은 최소한으로 자연에 손을 대며 굽이굽이 여러 방향으로 시선이 생기게 한다. 각진 현대도시의 공간에서 이러한 자연스러운 곡선을 어떻게 재현할 수 있을까?

곡면기하의 상징보다 마음을 포근하게 해주는 어머니의 젖가슴과 같은 동글하고 소박한 땅과 공간일지도 모른다는 후회가 막 급하다. 커다란 돔과 원형의 건물보다 자연스러운 곳이든 영묘한 곳이든 현대생활의 각진 단조로움을 감싸고 치유하는 비빌 둔덕 같은 솟은 곳과 주머니 같은 포근한 곳을 찾아내서 만들고 가꾸어가자. 마음속으로 손에 손잡고 강강술래의 동그란 궤적을 남길 수 있는 곳 말이다.

저작권자 © 대한건축사협회 건축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