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의 시간은 일 년이 두 개의 매듭으로 지나간다. 봄 학기는 풋풋한 새내기들을 받아들이는 일로 시작하고, 가을 학기는 5년을 준비한 졸업반 학생들을 내 보낼 준비로 시작한다. 가을학기가 시작되면 지난 5년을 준비해온 학생들 한명 한명이 마음에 담긴다. 이번 학기를 마무리하면 한 명 한 명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나기 시작할 것이다. 길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한편으로 기대와 희망을,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지난 5년 동안 무던히도 닦달하고 채근하였고,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얼마나 많은 날들을 설계실에서 지새웠던가? 밤늦게 학교를 나오면서 뒤돌아보면 건축학과 설계실만 환하게 불이 켜져 있지 않았던가? 밤을 환하게 밝히던 설계실의 불빛은 5년간 하루하루 쌓아온 장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비추고 인도하는 빛이 되어야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현실의 상황은 그리 녹녹치 않고, 남들 모두 4년 만에 졸업하는 대학을 일 년 더 공부하라고 요구했으니 마음 한 구석이 더욱 무거운 것도 사실이다. 이들이 건축설계를 업으로 하여 살아가야 할 세상은 우리가 살아온 세상과는 사뭇 다를 것이다. 우선 현재 겪고 있는 어려움이 건축설계시장의 양적 확대를 통해 해결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현재의 어려움은 일시적 경기부진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과거의 고도성장을 기반으로 하는 경제발전이나, 인위적인 부동산 부양정책으로 경기를 유지하는 방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 대부분의 인식이기도 하다.

일본의 고베에는 ‘HAT고베’라는 아파트 단지가 있다. 비교적 규모가 있는 단지이기는 하지만 고베 지진 이후 급하게 건설이 추진된 단지인데도 불구하고 하나의 단지를 3개의 개발주체와 13개의 설계사무소가 일을 나누어 진행하였다. 동경의 시노노메 캐널 타운도 6개의 주거동을 6명의 건축사가 각각 설계했는데 전체 배치계획의 기본은 일본설계에서 주도하였으므로 배치계획이 별도의 설계과업으로 독립한 셈이다. 마스터플랜을 담당한 건축사는 전체를 조율하는 작업의 대가를 요구하고, 개별 주거동을 담당한 건축사는 각 주거동의 설계를 정교하게 진행하고 그 대가로 일정 수준 이상의 설계비를 요구할 명문을 갖게 된다. 이러한 사례는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외국에는 흔하게 있는 일이며 우리에게도 필요한 일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방식이 작동하려면 다음의 두 가지 전제가 고려되어야 한다. 하나는 건축설계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일을 나누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함께 추진되어야 하기도 하고, 상호작용하는 관계에 있기도 하다. 일을 나누려면 부가가치가 지금보다 증가하여야 하고, 부가가치를 높이려면 지금보다 설계 작업의 세밀함이 증가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계에 투입하는 비용이 결과적으로 공사비에서, 분양성에서 설계비 이상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을 실증해 보여야 비로소 설계비의 증가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설계 작업은 고되고 가치 있는 일이니 설계비가 증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가을학기를 보내면서 배출되는 인력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보다 우선은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그릇을 어떻게 키울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나이든 사람들의 어른 노릇 아닌가 하는 생각에 나이 들어감의 무거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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